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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들 Feb 17. 2024

민원인의 갑질이 무서운 공무원

최선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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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팀 전화 벨소리가 저만치 들린다. 곡명은 비창소나타 제3악장. 만든 사람은 베토벤. 회사에서 듣는 베토벤 바이러스는 더 이상 명곡이 아니다. 전화 온 곳은 홍보실장님이었다. 우리 과와 관련이 없는 부서인데 웬일인지 얼마 전 완료된 우리 팀 사업에 대해 묻는다. 지인 중에 아는 사람이 토지소유자가 있나 보다 생각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질문이 예사롭지 않다. 곧 실장님은 전화기 너머에 기자가 있다고 하셨고 나는 곧바로 문제가 됐던 토지의 파일폴더를 열었다. 퐁더에는 날짜별 민원을 기록해놓았다. 민원인이 찾아와 고성을 지르고 과장님을 협박하던 날이 지나고, 또 한번 사무실이 소란스러웠다가 이번에는 기자 찾아왔다.


 "실장님, 제가 올라가서 설명드릴게요"



A의 토지에는 B의 작은 컨테이너가 B의 토지에는 A가 휀스와 진입로가 있다. 땅 모양이 삐죽 나와있어 서로 점유현황이 저촉된 상황이다. 두 집의 울타리는 15년 전 A가 설치했고 양쪽 소유자는 실제경계로 알고 다툼 없이 지내왔다. 이 사업으로 현황대로 경계를 정하고 사업이 완료되었지만 B는 불만이다. 도면상 B의 토지이나 실제 A가 사용하는 진입로 때문이다. 땅의 가치는 도면상 도로가 닿아있는지 여부가 아주 크게 작용한다. B의 의견은 '진입로가 A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니 보통의 감정평가 금액으로 정산하지 말고 토지로 교환했으면 좋겠는데 진입로 면적이 4평이니 진입로 면적의 4배인 16평을 달라'는 조건이었다.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상대에게는 꼭 필요한 땅을 '그냥' 줄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있는 상대는 없으므로 원만히 해결되지 않은 채 규정대로 완료되었다.



연두색 - 조정된 경계, 파란색 - 지적도 경계 (휀스부분은 생략했습니다.)


 

 관련법은 오래전부터 다툼이 있던 상황이 아닌 경우 현황대로 경계를 설정하도록 되어있다. 토지 소유자가 사업 전 경계로 존치하는 원해도 법은 그렇지 않다. 토지경계를 강제로 조정하게 되는데, 관에서 개인재산권을 승낙 없이 조정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지만 토지의 정형화와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어느 정도 제한을 두어야 하는 것도 이해한다. 실제로 규정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면서 소유자 만족도는 체감상 8:2 정도인데 불만족의 '2'가 언제나 문제다.

 

 어쨌든 소유자 A 씨는 화났다. 이해한다. 소유자 승낙 없이 경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에 화난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본인 요구사항이 무리한 것임을 왜 모르는가. 이런 상황이 알 박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소유자에게 답답한 심정을 말했었다. B소유자는 신문사에 찾아간다.

 기자가 찾아온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프다.


 



 협의했던 과정과 법조문을 출력한 A4용지가 프린터에서 나오는 동안 명찰을 목에 걸었다. 갓 태어난 A4용지는 따뜻했다가 곧 온기가 사라졌다. 자, 3층으로 가자. 업무수첩에 자료들을 끼워 넣고 3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혀를 굴리며 말할 순서를 읊조렸다. 보도자료 때문에 통화한 적은 있어도 민원으로 기자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다. 그곳에 들어가 목례하고 자리에 앉았다. 기자 두 분이 앉아있었고 실장님은 다른 일정으로 자리를 급하게 비우셨다. 기자 앞에 앉았다. 그런데 담당팀이 왔음에도 다른 이야기를 둘이서 주고받는다. 업무수첩을 펴고 본펜을 까딱하다가, 출력한 자료에 시선을 두었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화제가 바뀌고 그제야 기자 두 분의 시선은 나에게 왔다. 건네받은 기자의 명함을 업무수첩에 끼워 넣고 "저는 명함이 없어서요.."라며 인사를 대신했다. 긴장된다. 그들은 이미 의심 가득한 표정이다.


 악성민원은 의견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무조건 가장 상위직급자에게 찾아간다. 시군에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군수실, 시장실, 도청, 권익위원회를 거쳐 그 민원은 영원히 서랍 속에서 잠들기도, 수년뒤 다시 시작되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고 해결할 수 없을 때 청와대를 간다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기자는 다르다. 누가 맞고 틀린 지가 중요하지 않다. 기사 나는 순간 누구 말이 맞든 먹물은 튀고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역시나 내가 설명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몇 마디 듣더니 말을 잘랐다. 아깐 자세히 듣고 싶다면서요! 기자의 말을 들었다. 두 분은 앞서 내 잘못에 대해 말했고 취조했다. 답을 정해놓고 묻는다.


 떨리는 손으로 업무수첩을 열고 자료를 내밀었다. 이제껏 다툼이 없던 토지라면, 실제 현황대로 경계설정을 해야 한다는 법조문을 먼저 설명했다. 담당자로서 민원야기가 예상되는 것을 알고도 의견수용 없이 처분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부담을 무릅쓰고 이렇게 결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이해를 구했다. 법령 해석은 소송 판례와 질의회신집을 참고했기 때문에 달리 해석한다면 소송을 통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토지 소유자가 왜 화가 났는지도 이해한다고 했다. 소유자가 경계조정 조건을 무리하게 진행하려 한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기자는 A가 같은 소속 퇴직 공무원이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행정에 대해 무지한 민원인을 두고 업무담당 공무원은 상대측 토지 소유자(퇴직공무원)가 유리하도록 경계설정을 한 게 아니냐며 따졌다. A소유자가 공무원이어서 힘들었던 건 당신들이 아니라 나였는데. 속이 쓰리고 답답하다. 행정관청, 민원인, 기자가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이중 누가 손해일 것 같냐고 묻는다. 힘이 쫙 빠진다. 쓰러질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어지럽다. 담당자를 불렀다. 담당자는 인수인계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입시키지 않았었다. 신규공무원을 기자와 합석시키는 것이 미안했지만 내가 쓰러질 것 같았다. 쓰레기통에 다 쓴 이면지를 구겨 넣었더니 그게 나였다.

 




 담당자가 옆에 앉았고 같은 공간에 있던 타 부서 팀장도 합석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가는 대화가 아까보다 부드러워졌다. 담당자에게 나이와 고향을 묻는다. 동네를 묻고 학교를 묻더니 동문임을 확인했다. 같은 대학 같은 과, 결국 이 날 결론은 학연 지연으로 해사하게 끝이 났다. 분위기가 풀어지고 그제서야 우리팀의 입장에 제대로 귀를 열어줬다. 기사는 나지 않았고 기자님 감사합니다. 라고 한숨과 함께 감사인사를 했다.

 을의 태도는 그래야만한다.




 이 글을 쓰고 TV를 틀었는데 추적60분에서 악성민원의 실태에 대해 나온다. 자주봤던 민원인의 모습을 다뤄주니 씁쓸하면서도 고맙다. 민원인의 갑질을 그대로 맞딱들여야하는 상황이 힘들고 무서울때가 있다. 악성민원은 어디에나 있다. 일선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부디 잘 버티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랜기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피할 수 없어 부딪혔는데 상처가 아물더니 흉이 생겼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감염된 된 것 같다. 커튼을 걷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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