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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Apr 03. 2024

내가 만난 가장 큰 지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른했던 온몸의 세포가 파르륵하고 일어났다. 


  오늘 아침의 지진은 내가 대만에서 만난 가장 큰 지진이다. 대문이 비틀어져서 안 열리기도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뛰어 나갔다. 내 뒤를 이어 집에 남아있던 모든 하우스메이트들이 뛰어나왔다. 동네사람들이 우리처럼 다 밖으로 나올 줄 알았다. 집밖으로 나온 건 우리뿐이다. 우리는 골목에 서서 흔들리는 땅과 입간판들을 느끼면서 어떻해 어떡해만 연발했다. 

  "나 방금 샤워 끝내고 브래지어 한쪽 올리다가 말고, 샤워가운 걸치고 뛰어나온 거 있지." 메이쓰가 하는 말이다.

  "너 다행이었어. 그나마 다 씻었으니. 씻고 있었다고 생각해 봐. 어쩔 뻔했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오픈 싱크대의 윗 칸에 올려두었던 스테인리스 물병들이 여러 개 떨어져 있다. 건물 안에서 저것들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으면 겁났을 것 같다. 


  낸시는 청명절을 맞아 타오위안(桃園) 집으로 돌아갔는데, 전화가 와서는 자기 화장품이 떨어져 깨진 것은 없는지 묻는다. 그녀는 화장품을 사람 가슴폭 높이까지 오는 서랍장 위에 쭉 나열해 놓고 쓰는데, 평소에도 떨어져서 깨지겠다 싶게 아슬아슬하다.

  "화장품은 신기하게도 하나도 안 떨어졌어. 책상 위에 있던 다른 물건들은 좀 떨어졌네. 부서진 것은 하나도 없어, 걱정하지 마." 

  "그래? 깨지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우리 집은 어항 속의 물고기가 다 튀어나왔지 뭐야."


  지진은 늘 여진이 있기 때문에 다들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실에 앉아 놀란 가슴을 슬어내린다. 나는 화장실을 갔다가 변기에 앉았는데, 변기도 흔들리는 것 같아 식겁을 하고 뛰쳐나왔다. 지진의 진앙지는 어디이고 강도 얼마의 지진이었는지에 대해 정보를 나눈다. 대만인 하우스메이트는 걱정할 것 없다며 안심하라고 하지만, 딱히 안심은 안된다. 


  첫 번째 지진으로부터 삼십여분 지났을까? 첫 번째 여진이 왔다. 거의 첫 번째 지진과 비슷한 강도로 흔들렸다. 우리 전부는 또 잽싸게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번에도 골목에는 역시 우리뿐이다. 

  집으로 돌아와 대만 사람들 정말 강심장이라며 이야기하고 있자니, 방에서 위저가 차려입고 저벅저벅 걸어 나온다. 

  "너 집에 있었어?". 외국인 아가씨 셋이 물었다.

  "응."

  "지진이 이렇게 컸는데, 넌 어떻게 겁도 없이 방에 가만히 있었어?" 

  "위저는 화롄(花蓮) 사람이야. 이런 거 겁 안내. 화롄에서는 이게 생활이래." 대만아가씨 캉핑이 대신 대답해 준다. 

  오늘의 전앙지가 바로 화롄 앞바다다. 화롄은 한국사람들이 대만에 여행을 오면 가는 타이루거가 있는 도시다.  


  펑뤠이와 메이쓰는 랭귀지 스쿨에 다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지진 때문에 오늘 수업을 안 한단다.  

  "뭐 이만 일에 수업을 안 해?" 두 대만인의 반응이다. 

  "랭귀지스쿨 학생들은 다 외국인이잖아. 외국인들은 지진에 좀 과민 반응해. 이 정도 지진이면 애들이 쇼크상태라 수업을 할 수 없을 거야." 내가 옛 경험에 의거해 대답해 준다.

  "우리 집은 2층이잖아. 랭귀지스쿨은 10층 건물이라고. 높은 곳은 얼마나 더 흔들린다고?" 펑뤠이가 덧붙였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피해 상황 사진들이 날아왔다. 

  펑뤠이와 메이쓰가 다니는 랭귀지스쿨의 사무실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평소에 보면 학생들이 왔다 갔다 하는 복도와 업무를 보는 사무실이 분리된 것 같지 않아서, 언어가 안 돼도 쉽게 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오늘 그 전면 통유리가 자르르 깨졌다. 아침 일찍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펑뤠이의 친구가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집주인은 지상철의 교각이 삐끗하고 뒤틀린 사진을 보내오며, 지상철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운행을 하는지 잘 알아보고 다니라고 알려왔다.

  뤠이는 단체 라인에 자기 사무실 피해 상황 사진을 올렸다. 사무실 천장은 언젠가 배운 적 있는 습곡처럼 석판 하나하나가 물결무늬를 이루며 튀어나오고 들어가고 했다. 


  지진이 있고서는 가스레인지를 켜는 게 겁나 점심은 나가 먹기로 한다. 나가다 보니, 사대야시장 코너에 있는 우육면 집이 무너졌다. '와우, 저렇게 무너지는 거구나.' 언뜻 보면 상당 겁이 나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고, 건물 밖으로 덧낸 간이 지붕과 간판이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종이 구겨지듯'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봤다. 


  처음의 지진과 거의 같은 급의 여진은 한 번뿐이었지만, 오후까지도 약하게 좌우로 흔들흔들하는 여진은 아주 여러 번 계속되었다. 의자에 앉아 있자면 그 흔들림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나는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는 푹신해서 흔들리는 게 좀 무디게 느껴진다. 

  너무 긴장모드였기 때문에, 중드를 볼 마음도 안 생겼다. 그렇다고 앉아 아무것도 안 하고 긴장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뭐라도 들고 읽는다. 그 덕에 정말 읽기 싫어서 계속 미루던 과제물 하나를 대충 읽어냈다. 


  "지금 또 흔들리고 있지?" 메이쓰가 긴장해서 말한다. 

  "지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냐, 흔들려." 메이쓰가 더 긴장해서 외친다

  "아냐, 안 흔들려."

  메이쓰가 앉아있던 테이블이 흔들렸던 것은 뤠이가 앉아서 다리를 달달 떨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랐잖아, 뤠이."

  지진을 한번 느끼고 나면, 한 동안은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조금만 흔들리면 또 지진인가 하고 기겁을 하게 된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이렇게 큰 지진을 겪자 '그냥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만 있다면 너무 따지지 말고 모든 일에 너그러워지기로 다짐한다. 

  겁나는 일을 겪을 때마다, 착하게 살기로 다짐하는 경향이 내게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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