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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선생이 다쳤다

딴쉐이(淡水) 역에서 산즈(三芝)까지, 15km

by 김동해

약속은 동먼(東門) 역에서 8시 30분에 만나서 출발한다였다. 왕 선생은 20분이 늦을 거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왕 선생은 나이 든 사람답잖게 아침잠이 좀 많다. 엊저녁도 잠이 안 와 애를 먹었던가 보다. 그는 불면증이 있다. 그렇게 해서 출발이 늦어진다.

딴쉐이(淡水)에 도착해서 정식으로 도보를 시작하기 전에 바다가 바라보이는 예쁜 풍경에 자리 잡고 앉아 왕 선생에게 먼저 아침을 먹으라고 권한다. 딴쉐이(淡水) 역에서 바다 쪽으로 좀 걸어 들어가면 스타벅스가 있고, 스타벅스에서 조금만 더 가면, 한쪽은 우람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쪽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다. 이 하구는 바다로 들어가는 강물과 만조 때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이 함께 있어서, 그 물색이 반반 다르다. 우리는 그 오묘한 물색을 보면서, 왕 선생이 아침을 먹도록 기다렸다. 다행히 풍경이 아름다워서 기다리는 것이 지겹지 않았다. 그랬지 않았더면, 나는 ‘아침을 먹고 오기로 했잖아?’하고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세 멤버 모두 배가 든든하니 이제 출발이다!

'어디로 가지?'

게으른 여행자인 나는 '딴쉐이(淡水)에서 출발한다'를 결정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다 짠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출발하려고 구글 지도를 보니 101번 도로 길과 2번 도로 길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101번 도로 길은 지도상으로 보건대, 구불구불해서 시간이 훨씬 더 걸릴 것 같다. 걷기를 좋아한다지만, 긴 길과 짧은 길의 선택지가 있으면 모순되게도 짧은 길을 선택하게 된다.

"2번 길을 따라가죠 뭐. 더 짧아요."

왕 선생과 쓰리럼은 아무 의의도 없다. 둘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란다. 자기들은 내 도보여행의 시작을 동반하러 왔을 뿐이며, 동행에 의미가 있지, 무슨 풍경을 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2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기로 한다. 사실, 이 선택은 좀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번 도로를 따라가면 계속 마을이 나타나기 때문에, 편의점에 들러 먹을 것을 사고 화장실도 들릴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차가 너무 많이 다녀서 시끄럽고, 특별히 인도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차량과 경쟁하며 걸어야 해서 다소 위험하다.


중간중간 저걸 먹었으면 좋겠다 싶은 맛있어 보이는 식당들도 있었지만, 점심 선택권은 왕 선생에게 줘야 했다. 왕 선생은 채식주의자다. 그와 함께 뭘 먹으려면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다. 그에게 고르라고 했더니, 세븐일레븐을 골랐다. 나는 세븐일레븐의 데워먹는 음식을 딱히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싫어한다. 나는 삼각김밥 두 개를 먹었다.


오늘 목적지를 딱히 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 선생이 다치지만 안았더라면 해가 어둑해질 때까지 걸었을지도 모른다. 왕 선생이 다치는 바람에 그만 걷고 돌아가기로 한다.

내가 저수지를 보겠다고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왕 선생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길에는 물레방아를 세워두고, 이 저수지에 대한 설명을 막 해놨는데, 그 글을 읽는 것은 귀찮아서, 해설판을 읽는 대신 다가가서 눈으로 보는 쪽을 택했다. 저수지가 어디 있다는 말인지, 그냥 냇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왕 선생이 내 뒤에서 뭐라고 뭐라고 설명을 하며 따라 걷다가, 짚은 돌이 미끄러웠던지 앞으로 파닥하고 넘어졌다.

"악!"

너무 순식간이라 그를 잡아주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으면서도, 그가 넘어지는 순간을 확실히 다 봤다. 그가 파닥하고 넘어진 동작의 크기는 어딘가 부러졌겠다 싶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전부 찰과상이다. 하지만 피는 좀 많이 났다. 저 정도면 피가 송골송골 조금 맺히고 그칠 만도 한데, 왕 선생의 피는 끈적거리는 느낌이 전혀 없는 맑은 피여서 그랬던지 성글성글 맺혔다. 그리고 곧 줄줄 흘러 뭔 큰일이 난 것처럼 보였다.

"병원을 가봐야 되지 않겠어요?"

왕 선생은 어디 잠시 쉬면서 상처 처리만 하면 될 것 같다고 한다.

쉬엄쉬엄 쉬면서 걸었어야 했다. 왕 선생은 몇 년 전에 퇴직을 했으니 65살은 넘었고, 70은 넘지 않았다. 나는 왕 선생을 너무 노인 취급해 주지 않았다.

'내가 너무 빡세게 걸어서, 기운이 바닥나서 돌을 헛디딘 거야. 미안해요, 왕 선생.'

20분을 더 걷자 편의점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식염수, 연고, 밴드를 사서 처리를 했다.

나는 찰과상이든 뭐든 상처 보는 일을 좀 끔찍스러워한다. 상처를 보면 내 아픔처럼 너무 상상이 되어서다. 쓰리럼에게 좀 도와주라고 하고는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가버렸다. 화장실을 갔다 왔더니 쓰리럼은 서서 지켜만 보고, 왕 선생 혼자 고전을 하고 있었다. 상처 부위는 혼자 처리하기 좀 어려운 부위였다.

왕 선생은 식염수로만으로는 안 됐던지, 물티슈를 하나 사겠단다. 쓰리럼이 자기 물티슈를 꺼내서 건넨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왕 선생을 본 적이 없는데, 왕 선생은 시시 컴컴하게 생긴 인도 녀석 쓰리럼의 것을 쓰는 것이 영 찝찝한 눈치였다. 왕 선생은 영 새것을 사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 둘이 있는 걸 쓰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쓰리럼의 것을 받는다.

왕 선생이 물티슈로 상처를 쓱 닦는데, 나는 쓰린 것이 너무 상상이 된다. 그리고는 그 위에 식염수를 한번 더 붓고, 연고를 발랐다. 그리고 밴드를 붙이는데, 쓰리럼이 돕는다. 쓰리럼이 거즈까지 만지작거려서 왕 선생이 찝찝해할 것 같다. 밴드는 내가 붙여준다. 밴드가 어찌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이 부분을 떼고, 저 부분을 떼고 뭐 그래야 했다. 그래도 뭔가 어설프게 붙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밴드 테두리 처럼 되어있는 종이도 떼야하는 거였다. 뭔, 밴드를 그따위로 어렵게 만들어 놓는담.

밴드를 붙여놓으니 안심은 되는데, 왕 선생의 상처는 피가 정말 많이 난다. 밴드 가득 피가 뻘겋게 빵빵하니 찼다. 쓰리럼은 피가 나는 것은 상처를 깨끗이 소독해 주는 효과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단다. 좋은 현상이란다. 쓰리럼은 의학과 관련한 뭔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대만에 와 있는데, 의학을 아는 그가 하는 말이니 맞을 것이다.

왕 선생이 혼자 식염수를 붓고, 약을 바르고 하는 걸 보면서, 이런 것조차도 담담하게 처리해주지 못하고, 말로만 호들갑을 떠는 나 자신이 좀 싫었다. 어른스럽지 않아서 싫었다. 내가 만약 이렇게 상처를 입었다면, 누군가 담담히 치료해 주면 참 고마웠을 것이다. 내가 내 상처를 처리하도록 놔두지 않고.

나이 많은 친구를 데리고 여행하는 것은 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햇볕에 쓰러지거나, 걷다가 넘어지거나 해서 다치면, 같이 동행하는 내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느냔 말이지.


산즈(三芝)에는 시내버스가 상당히 많았지만, 주말에는 운행하지 않는 차편이 많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딴쉐이(淡水) 역으로 돌아온다. 시내버스는 거의 우리가 걸은 길을 그대로 돌아왔다. 걸으며 느꼈던 길과 시내버스를 타고 획획 지나가면서 보이는 경관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걸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마을이 느껴진다.

딴쉐이(淡水)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타이베이(台北)로 돌아온다. 왕 선생은 동먼(東門) 역에서 내리고, 나와 쓰리럼은 구팅(古亭) 역에서 내린다.

왕 선생이 나 때문에 다친 것 같아서 영 미안하다. 왕 선생의 딸들이 다시는 나와 나다니지 말라고 잔소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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