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면 와서 지내는 이곳 시골에는 탑들이라고 불리는 농지가 있다. 농지가 넓게 쫙 펼쳐져 있고, 그 중간에 석탑이 하나 서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농지 가운데로 차량들이 드나들 수 있게 넓은 시멘트 농로가 곧게 뻗어 있다. 농로 옆으로 작은 도랑을 두어 양 옆 농지로 물을 대기 편하게 해 놨다. 한마디로 농사짓기 편하게 농토와 농로와 관개 시설을 잘 갖춰놨다.
나는 해가 저물기 전에 이곳으로 운동을 나간다. 탑들 가운데 일직선으로 뻗은 농로를 끝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면 딱 하루치 운동량이 된다.
시골에는 걷기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도 있다. 냇가 둑을 따라 걸어도 좋다. 마을 쪽 냇가 둑에는 자전거길을 조성해 두고 벚나무를 심어놔서, 나무 그늘로 걸을 수 있다. 봄이면 벚꽃이 피고, 눈꽃처럼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냇가 다리를 건너 반대편 둑으로 돌아오거나, 햇볕이 싫으면 마찬가지로 벚꽃나무가 심긴 둑길로 돌아올 수 있다. 냇가 둑길은 가면서 보는 풍경과 돌아오면서 보는 풍경이 다 너무 예뻐서 지루하지 않게 걷기 운동을 할 수 있다. 단점은, 워낙 시골이다 보니 가끔 뱀이 나타난다. 나는 한 번도 직접 살아 움직이는 뱀을 보지는 못했지만, 차에 깔려 죽은 듯한 납작한 말라빠진 뱀껍질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혼자 걷기 무섭다.
초등학교 운동장도 걷기 운동을 하기에 좋다. 흙길이어서 발과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시골에서도 농토를 제외하면, 운동장은 시멘트나 보도블록이 깔리지 않는 유일한 땅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곳으로 운동을 나가지 않는 이유는, 하루 운동량을 채우려면 운동장을 열서너 바퀴 돌아야 하는데, 이게 너무 지루하다. 거디다가, 해가 어스름해서 가면 동네 어르신들이 다 나와서 걷기 운동을 하시는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야 하는 게 너무 귀찮다. 내가 사는 시골 마을은 너무 작아서 누가 아침에 방귀를 뀌면 저녁이면 온 동네가 아는 정도라, 다들 아는 사이라 인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둘러막고 모자를 눌러쓰고, 탑들 농로로 걷기 운동을 나간다. 동네 사람들은 농번기에는 이 길로 운동을 나가지 않는다. 6월 초에서 중순까지는 마늘과 양파를 뽑아내고, 논을 갈아서 흙을 보드랍게 한 후에, 물을 넣어서 모내기를 하는 시기다. 우리 엄마 말이, 이 시기에 탑들로 운동을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는 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저 여편네는 팔자가 좋아서 운동을 하네.'라고 욕을 한단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엄마의 말이 말도 안 된다 싶었지만, 정말로 이 시기에는 나 말고 아무도 이 길로 걷기 운동을 나오는 사람이 없다. 모내기가 끝나고 나면, 논에 물을 대는 일 말고는, 벼가 자라도록 기다리는 일밖에 없어서 탑들은 고요해진다. 그때는 나 말고도 걷기 운동을 하러 나오는 어르신들이 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면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 아무렇잖게 탑들로 걷기 운동을 간다.
오늘, 어이쿠, 걷다가 개를 만났다. 이 개는 지난 여름에도 한번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개는 주인아주머니 꽁무니를 따라 나온 거였다. 운동 나온 나를 발견하고는 멀리서부터 쏜살같이 뛰어와서는 컹컹 짖었다. 나는 완전 겁에 질렸다. 어릴 적 경험이 있어, 뒤돌아 뛰어 도망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우뚝 멈춰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아주머니가 개를 불러들여 내게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랬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투덜거렸다.
"아니, 이 놈의 시골마을은 왜 개를 풀어놓고 그래?"
오늘 다시 그놈을 만났다. 주인 부부가 논에서 일을 하는데, 개는 따라 나와 논둑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 나온 나를 발견하고는 무섭게 짖었다. 송곳니를 최대한 드러내서 위협했다. 개 송곳니만 드러날 때도 무서운데, 잇몸까지 까짓것 드러나도록 으르렁댔다. 잇몸이 드러나면 더 무섭다.
'나, 이 놈의 개 때문에 오늘 또 운동을 포기해야 하는 거야? 저 사람들은 개가 이렇게 짖는데 왜 와서 날 좀 도와주지 않는 거야?'
부부는 고랑 낸 밭에 기계로 비닐을 덮어씌우고 있었는데, 이만 일로 그 일을 멈추고 와서 나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멈춰 서서 한참 대치하다가, 이 개가 조금도 부드러워지지 않아서, 안 되겠다 하고 운동을 포기하고 돌아서서 걸었다. 그랬더니 개가 짖기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아예 내 뒤를 따라오며 으르렁 거린다.
'이래서야 돌아갈 수도 없잖아.'
멈춰 서서 개와 대치를 했다. 개는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으면서 겁나게 짖어댔다. 개 주인 부부는 아랑곳 않지, 누군가 와서 도와줄 리는 만무하지, 내가 용기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개한테로 다가갈 듯이 발을 굴리며 개를 위협해 봤다.
"깨갱 낑낑낑."
개는 놀라 자빠지며 뒤로 멀직이 후퇴를 했는데, 조금만 더 놀랐다면 도랑 물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하, 너도 날 겁내는구나?'
개가 허둥대며 나자빠지듯이 후퇴하는 모양새에서, 잇몸을 드러내며 으르렁대는 것은 허세라는 것이 들통났는데도, 자세를 다잡은 다음 다시 으르릉댔다. 이때 마침 트럭 한 대가 지나가며 나와 개를 공간적으로 분리시켜 주는 틈을 타 나는 무사히 개가 지키고 있는 길을 지나 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돌아갈 때 다시 한번 개를 마주쳐야 하니, 농로길 말고 도로길로 빙돌아서 돌아갈까를 궁리했다. 그러면 너무 멀고, 도로길은 차가 다녀서 시끄럽고 위험해서, 다시 개와 부딪혀보기로 하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아까 나와의 기싸움에서 졌으니, 이번에는 설마 안 짖겠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놈이 또 짖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더 멀찍이 떨어져서 짖었다. 잇몸을 무섭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안 짖으면 개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짖기는 해야 하나보다. 그냥 아무렇잖게 걸어서 지나쳤더니 짖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뒷모습을 보이며 걸으면서, 개가 뛰어와 물어뜯을까 봐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우, 내가 해냈어!'의 기쁨을 느끼면서.
개를 좋아해야 개를 겁내지 않을 텐데, 나는 그게 어려울 것 같다. 자기가 가진 힘보다 더 허세를 부리며 으르렁대는 개의 본성이 싫다. 밥 챙겨주는 주인에게는 밑도 끝도 없이 졸랑졸랑 따르는 우매한 충성 본성도 싫다.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일지 모르는데, 나는 처음이라서, 개랑 기싸움에서 이긴 오늘,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