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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an Sep 11. 2017

# 잊는다는 것을

 "사람은 잊어?"


 A가 문득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 놓고 A를 바라보다가 그 뒤에 떨어지는 빗방울, 그것들이 내는 탄성을 들었다. 잊는다. A는 이야기 했다. 잊어? 


 "잊지."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A는 그런 나의 눈을 잠시 응시했고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잊어. 사람은 잊어. 

 잊는다는 것이 갑자기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삶을 살아냈다.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을 이겨내며 살아왔다. 초로 따지면 장황히 길고 분으로 따져도 장황히 긴 시간을 살았고 년으로 따져도 두자리 수를 살아냈다. 

 

 "너는 얼마나 많이 기억해? 나는 잘 모르겠어."


 A는 이런 말을 남기고 일어났다. 코에 바람을 살짝 킁 넣었다가 책을 집어 들었다. A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힐끔 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가 잔잔했던 가슴에 소나기를 때려 부었다. 마치 지금 바깥에 내리는 비처럼 말이다. 나는 내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과거의 삶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딸랑 소리와 함께 짙은 커피향을 뚫고 들어왔다. 검정우산을 탁탁. 바닥에 몇방울의 비냄새가 침범했다. 온통 백색의 머리는 짧게 단정되어 있었고 약간 헐렁한 분홍색 티에 날씨에 맞은 가디건을 걸치셨고 눈에는 상상과 똑같은 노안 전용 안경을 착용하셨으며 발목이 살짝 보이는 장치마를 두르고 검은색 단화를 신으셨다. 딱 봐도 그 나이까지 패션의 감각을 잊지 않으신 분 같았다. 그러나 걸음걸이와 피부의 주름이 그 나이를 어림짐작하게 했다. 


 "언제 이런 가게가 다 생겼어요."


 할머니는 카페를 둘러보시다가 박수를 짝 치셨다. 소녀 같으셨다. 점원이 능숙하게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가게 한 쪽의 테이블로 인도했다. 


 "이쁘죠?"


 점원의 밝은 미소가 덩달아 할머니를 미소짓게 했다. 


 "제가 또 남편 분께 연락을 해드려야겠어요."


 점원은 할머니가 매고 계신 목걸이를 잠시 뒤집어 보고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몇번 누르더니 귀로 가져다댔다.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가 남편이 어딨어, 젊은 양반."


 아, 내 가슴에 다시 비수가 날아들었다. 




  A는 돌아왔다. 그는 내 시선을 따라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나는 완전히 책을 덮은 상태였고 두 손을 깍지 껴 가슴에 묻고서 작게 힘을 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A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입모양으로 '잊어'를 두번 되풀이 했다. 아니, 나는 이 장면을 못 잊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어깨에 걸쳐진 가디건을 살짝 잡아 올리고 달달한 음료의 빨대를 입에 대주었다. 나는 할머니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눈 속에 잔뜩 들어가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황과 불안이 뒤섞인 알수없는 표정일 것이다. 할어버지의 웃음은 내가 시켜놨고, 또 금새 식어버린 쌉쌀음한 아메리카노 같은 것이다. 


 둘은 수많은 시간을 함께 했을 것이다. 나는 적지도 길지도 않은 삶을 살았고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을 이겨냈으며 초로 따지면 장황히 길고 분으로 따져도 장황히 긴 시간을 버티고 년으로 두자리수에 달했지만 그들의 삶은 어쩌면 곧 세자리수가 임박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감히 세자리수를 상상할 수 있을 나이일지 모른다. 

 나 같은건 짐작할 수 없는 초와 분의 시간을 사셨고 더 많은 역경을 견뎌내셨을 지도 모른다. 마치 격렬한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하며 함께 생존을 위한 혈투를 벌였던 두 전우들보다 훨씬 돈독한 사이였을 것이다. 애틋하고 설레는 사랑은 생각치도 못한 순간에 끝났을 지라도 그보다 더 큰 정과 사랑 이면의 것으로 살아온 세월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손이 어쩌면 움츠러들었던 할머니의 머리를 가만 가만 쓰다듬으셨을 때 나는 요동치는 가슴 속에서 울컥 치솟는 눈물이라는 것을 감지 않은 눈으로 붉게 붙들었다. 어쩌면 그 시간 이 고즈넉한 가게에서 흐르는 잔단한 음악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식어버린 아메리카노의 옅지만 농후한 향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손등에 새겨진 삶의 시간과, 손바닥에 가득 담긴 진하지만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사랑의 온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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