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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몬지 Oct 27. 2024

어떠한 환경에서도 즐길 수 있다면

1) 초면인 사람 40명과 함께 떠나는 왕복 10시간 국내 여행?

‘과감한 인생’


그 팀의 이름은 사람들의 괜한 호승심과 호기심이 들게 만들었다. '최악의 여행'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런 호기로운 여행을 기획한 걸까.


여행 당일, 나는 지정된 모임 장소인 일명 ‘과감한 아지트’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가 활짝 열려있는 철문으로 들어가니,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이 40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며 반말 모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멋쩍스러웠다.


우물쭈물 서툴게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고, 어색한 미소를 띠고 두리번거리며 적당히 자리를 찾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모두들 낯설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공기에서 가만히 맴도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호기로움과 여유가 가득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우리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마치 무대 위 배우가 입장하듯,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은 강렬했다. 눈길을 단숨에 끌어당기는 존재감이 있었고, 내가 여태까지 봐온 사람들 중에 가장 멋진 콧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그의 콧수염이 신기한지 뚫어지게 바라보다 곧이어 그가 첫마디를 던졌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나’가 아닌 누군가가 될 거야.”


사람들 사이에선 소리가 없는 긴장이 흘렀고, 모두들 미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나 또한 속으로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이 여행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이미 확실해진 것 같았다.


“너희들의 이름은 이제부터 없어.”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름, 나이, 직업, 심지어 너희들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거야."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나는 그가 말한 ‘새로운 나’라는 말에 묘한 두근거림과 일렁거림이 들었다. 항상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시간들. 그동안 쌓아온 이름과 정체성이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니. 어쩐지 해방감과 살짝의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자, 첫 번째 미션은 간단해.” 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이 이곳에 오기 전, 우리가 각자 사진 3장을 찍어오라고 했잖아?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어떤 사진을 찍어왔는지 말해주면 돼.”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에서 사진을 꺼내 들었다. 나도 미리 찍어둔 사진들을 다시 살펴봤다. 명동 찌개 마을이라는 작은 식당의 간판 사진이 있었다.


“자, 여기서부터 큰 소리로 한 명 한 명씩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간단하게 말해줘.”


주변에서 우스꽝스러운 말들이 터져 나왔다. “지하철에 비친 내 모습!” “신도림!” “기타!” 내 차례가 오자,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명동 찌개 마을!”


갑자기 모두가 나를 돌아봤고,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들이 최악의 여행에 가기 전 찍어왔던 사진에서 느껴지는 설렘, 걱정, 긴장감, 기대감 같은 그 마음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방금 말한 사진들이 너희의 새로운 이름이 될 거야.”


이제 내 이름은 ‘명동 찌개 마을’이 된 것이다. 내가 아닌 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하는 이 여행이 다들 생각한 대로 '최악'일지 몰라도, 너희들이 기억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이 될 거야."


그의 확신 어린 말을 끝으로 그들이 준비한 여행 신고서를 받았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즐길 준비가 되셨습니까?'라는 마지막 문장에 나는 당차게 YES에 체크 표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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