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잊지 마
[파이낸셜뉴스 기사 발췌] 한국피자헛이 피자헛 36주년을 기념해 추억의 맛과 감성을 담은 '레트로 스페셜 세트'를 출시한다고 6일 밝혔다. 이번 세트 메뉴는 5월 6일까지 한 달간 선보인다.
90년대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초등학교 시절 모습이 있다. 허리까지 오는 길쭉한 실내화 주머니, 모든 교과서를 꾸역꾸역 넣고 다녔던 책가방, 커다란 모니터가 누워있는 선생님 교탁, 초록색 박스에 학생 수 대로 담은 흰 우유, 초등학교 앞에서 팔았던 병아리 등.
우리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시절 모습에 당연히 나도 그 모습을 하고 있다. 작은 키에 실내화 주머니를 질질 끌고 다녔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모든 교과서를 책가방에 담아 열심히 메고 다녔다. 그런 내 모습을 할머니가 보고선 한 마디씩 했다. "꼭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책가방은 무겁더라!"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거다. 공부는 못했어도 키는 야무지게 컸으니까! 나라 사랑, 우유 사랑 덕에 행복한 숫자를 얻었다. 168cm! 남자로 태어났다면 185cm정도는 됐겠다.
그 당시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초록색 칠판을 닿지 않는 키로 열심히 닦은 다음, 드르륵 돌려서 털어내는 칠판 세척기 대신에 창문 밖 빨간 벽돌에 분필 지우개를 열심히 털어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바라본 교실 창문 밑은 언제나 분필 지우개를 털었던 네모난 자국이 남아있었다. 요즘은 기계로 다 닦아준다던데. 이제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 90년 대생들, 그땐 그랬지! 이런 추억쯤 하나씩 가지고 있겠다.
하릴없이 SNS를 뒤적이다 피자헛 36주년 이벤트를 보게 됐다. 피자헛 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추억의 피자헛 생일파티. 생일파티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90년대생 추억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마침 혼술을 하고 있었기에 맥주 힘을 빌려, 피자 하나에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며칠째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 집에 있는 전화기(스프링이 꼬불꼬불 연결되어 있는)로 엄마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마다 아빠는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빠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9살 동갑내기 친척이 있었다. 어느 날 친척이 나와 안면도 없는 친구를 데리고 내가 살던 집으로 갑자기 놀러 왔다. 모르는 친구를 허락도 없이 집에 데려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바로 옆 빌라에 사는 다른 반 친구 집을 가서 서스름 없이 벨을 누르곤 했으니까. "영희 집에 있어요?" 하면서.
갑자기 찾아온 친척은 뜬금없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얘 엄마랑 아빠랑 이혼했잖아. 그래서 집에 엄마 없어. 여기서 놀아도 돼." 나는 깜짝 놀랐다. 겨우 9살이 '이혼'이라는 뜻을 몰랐겠지만, 부끄러운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얼굴이 새 빨게 지면서 화를 냈다. "당장 나가!!"
다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랑 엄마랑 이혼했어요?" 아빠는 덤덤히 말씀하셨다. "너네 엄마 도망가 버렸다." 속으로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갑자기 엄마가 도망을 갔다고? 이혼이라는 뜻을 몰랐으니 내가 아는 '도망가다.'라는 뜻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이 후로 한 달쯤 지났을까. 저학년 친구들은 하교 시간이 빠르다.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천사소녀, 네티>를 보고 있었다. 이른 오후에 전화가 울렸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엄마!"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에 혼자 있어?" 아빠가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 나 혼자 있어. 엄마 언제 와?" 이혼했는데 '언제 와?'라니.
엄마는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딸, 곧 생일이지? 엄마가 생일파티해 줄 테니까 친구들 보고 피자 먹자고 해. 알았지?" 얼마나 방방 뛰었는지 모르겠다. 피자라면 응당 <피자헛>이었다. 시골에서 유일한, 브랜드가 있는 피자집이었기 때문이다.(차마 메이커라는 단어는 쓰지 못하겠다.) 엄마는 한 번도 생일파티를 해준 적이 없었다. 늘 집에서 가족과 함께 밥먹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내 기억으로는 말이다.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내 생일은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생일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의 얼굴보다 피자헛에서 피자를 먹을 생각에 더 설렜다. 학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끝나자마자 후다닥 친구들과 뛰어갔다. 후문 앞에서 파는 병아리도 그냥 지나치고 뛰었다. 양껏 책을 담은 가방을 메고, 나보다 긴 신발주머니를 질질 끌고, 피자헛으로 뛰어갔다. 초등학교에서 피자헛까지 200m였다. 지금 걸어보면 2분도 안 되는 거리이다. 아주 작았던 나는 더 열심히 뛰어야 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더 더웠다. 친구들과 땀을 뻘뻘 흘리면서 피자헛에 도착했다.
내 생에 첫 생일 축하파티였다. 그것도 피자헛에서! 친구들과 거대한 테이블에 앉았다. 행복을 만끽하기도 잠시, 세상이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너무 어지럽고 울렁거려서 피자를 먹을 수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피자를 한 입 베어 먹다 말고 드러누웠다. 걱정스러웠던 엄마는 얼린 요구르트를 이마에 대주었다. 더위였다. 너무 기쁜 나머지 더위 속에서 뛰었던 게 문제였다. 그렇게 기다렸던 피자는 먹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누워있어야 했다.
피자에 정신 팔린 친구들은 하염없이 먹기 바빴다. 그래도 가장 친했던 무지개 어린이집 원장 딸, 지혜가 나를 챙겨주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를 안쓰럽게 보다가 수박 한 조각을 주었다. 시원한 한 조각이 잠시나마 어지럼증을 잠재웠지만 다 먹고 나면 다시 세상이 돌고 돌았다. 나는 또 수박을 먹었다. 피자도 못 먹고 수박만 먹다가 생일파티를 끝내야 했다. 모양은 똑같아도 맛은 다르잖아! 나는 너무 억울했다.
엄마는 택시를 불러서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택시에서도 내내 누워있었다. 겨우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내리지 않았다. 잘 지내라는 말만 남겼다. 나는 그 말 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빨리 택시에 내려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구토를 했다. 점심 끝나고 먹었던 우유와 피자헛에서 먹었던 수박을 도로 한가운데 쏟아냈다. 이것이 핑크빛 도는 첫 생일파티이자 추억 속의 피자헛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보다 피자를 반겼던 나는, 그때 참 행복했다. 정말 엄마가 없구나를 깨닫기 전까지는 반 친구들에게 피자헛 생일파티를 내내 자랑하고 다녔다. 어릴 때였으니까, 아무것도 몰랐을 때였으니까, 그땐 그랬으니까. 내년에도 생일파티를 해주겠지, 내후년엔 생일파티를 해주겠지. 하지만 엄마는 찾아오지 않았고, 10년이 흐르고 나서야 아빠의 술주정을 듣고 알았다. 그때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었음을. 엄마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아빠와 더이상 살 자신이 없었고 나를 두고 떠났다. 마지막 선물을 생일 파티로 대신 했던 엄마의 마음을 지금은 이해한다. 아빠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지금의 나. 이제는 케이크에 촛불을 켜는 일이 반갑지 않다. 어릴 땐 초코파이에 꽂는 촛불 하나에도 서로 불겠다며 광분을 했었는데, 언제 이렇게 덤덤해졌을까 생각한다. 촛불, 그저 소원 빌기용이 되었다.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남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 저 인간 좀 어떻게 해주세요'
나의 행복은 피자헛 생일파티에서 멈춰버렸다.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인 나, 다시 피자 하나에 행복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