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진 May 21. 2021

소주는 깨달음을 얻게 해

우리가 가진 결핍

띵- 하고 찾아오는 깨달음은 대부분 술을 먹고 올라오는 감정을 더듬어 보았을 때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술을 통해 증폭시킨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가진 결핍을 찾을 수 있다.


친구들과 오토캠핑을 떠나는 날이었다. 기상청은 오늘도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고 소식 없던 장대비가 쏟아졌다. 여름이니 이해하자기엔 심하게 내리는 폭우였다. 그 폭우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텐트를 쳤고, 드디어 타프 아래 불을 피워 겨우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소주가 잘 받는 날이었다. 어쩜 이리도 달까. 고단했던 텐트 치기, 젖은 장작으로 불멍 만들기 덕분일까? 인생도 이렇게 달면 얼마나 좋으랴, 보상 심리라도 발동한 듯 세 명이서 소주 11병을 해치웠다. 평소 주량을 넘어선 술상이었다. 알코올이 간에서 바로 해독이라도 되는 것일까. 비가 그치고 맑게 개는 밤하늘처럼 정신도 개운했다.


그래도 술기운이 오르는지 친구 하나가 삐걱거리는 직장 생활에 대한 세드 스토리를 꺼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회사 동료들과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회의를 할 때마다 개껌 씹는 개처럼 사람을 물어뜯으려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고, 그런 자신을 보며 후회를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인간관계가 힘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스스로 이겨내 보자 하며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등. 전부 위로에 관련된 책이었다. 마음을 진솔하게 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만 보니, 손이 가는 책은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일러주고 있었다. 친구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이러한 책에 손이 갔던 것이라 말했다.


나는 이 친구의 말에 공감했다. 나 또한 디자인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 디자인 관련 책을 구매하여 책장에 쌓았기 때문이다. 책장에 나열된 책을 통해, 알게 모르게 배움에 대한 결핍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로에 대한 결핍을 드러낸 친구의 책장처럼 말이다.


그러다 시선은 술상으로 향했다. 피어오르는 불 위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삼겹살, 버너 위에서 보글보글 구수한 향을 풍기며 끓고 있는 된장찌개, 달빛처럼 반짝이는 투명한 소주병. 우리는 왜 함께, 하필 비가 오는 날, 우중 캠핑을 와서, 사서 고생하고, 맛 좋은 소주 앞에 한없이 진솔해지는 가.


직장 생활 이야기를 지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말했다. 어쩌면 책뿐만이 아니라 가훈도 가장의 결핍을 걸어둔 것이라고. 나의 집, 가훈은 '밝고 정직하게 살자.'였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딱히 밝은 사람도 정직한 사람도 아닌 것 같다. 밝은 사람이었다면 집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을 것이고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나에게 엄마가 도망갔다는 거짓말 따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고기가 익는 냄새를 맡았다. 서둘러 집게로 고기를 집어 가위로 잘랐다. 친구 앞접시에 하나, 다른 친구 앞접시에 하나, 내 앞접시에 하나. 그리고 빈 소주잔에 소주를 콜콜 채웠다. 짠-을 외치며 잔을 부딪히고 시원하게 원샷을 하고선 고기를 한 점 먹었다. 바삭하고 촉촉하게 잘 익은 돼지고기가 달큼하고 알싸한 소주 속에서 헤엄을 쳤다. 그래! 이 맛이지!


그렇다면 우리의 술상에서 드러내는 결핍은 무엇일까. 목구멍을 타고 소주와 안주가 넘어가고 나서야 술상으로 시선이 옮겨진 이유를 찾았다. 우린 모두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친구가 늘어놓은 고민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책이 아닐 것이다. 친구가 고민을 늘어놓았던 건 현재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행복하지 않은 공간을 도망쳐 함께 캠핑에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속에 텐트 하나로 서로를 의지한 채 독립된 공간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지. 이 여행으로 행복을 찾길 바라면서. 우리는 모두 행복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책장에 알맞은 책을 더 꽂아준다고 하여 친구의 결핍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또한 함께 캠핑을 왔다고 해서 지속적으로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이상한 논리가 될 수도 있지만 '알아주는 것'까지만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현재 이러한 상황이고 이러한 상태임을 입 밖으로 꺼내어 알아주기까지만 해도,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 엄마가 나에게 했듯이 나도 친구에게 똑같이 해주자. 엄마가 나의 울음을 묵묵히 들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힘들면 내려놔."


친구는 나의 말을 듣고 한결 온화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이 한마디면 되었다. MBTI에 F건 T건 행복해지는 방법 앞에선 누구든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감정이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장작은 점점 불씨가 꺼져갔다. 흰 연기가 하늘 위로 아지랑이가 피듯 올라갔고, 타는 냄새는 우리에게 취침 시간을 알렸다.



이전 03화 밥상을 처음으로 엎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