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나가면 나도 애국자
2015년, 한 달 동안 이탈리아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나는 홀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3개월간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하여 한 푼도 쓰지 않고 300만 원을 모았다. 그 당시에는 열정 넘치는 청춘들이 유행처럼 해외로 떠나는 분위기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도피성이 강한 여행을 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남들처럼 취직하기 싫어서'였고 두 번째는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어서'였다. 대체, 왜, 한국은 정해진 나이에 취직을 해야 할까,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하면서. 그때 나는 정말 한국이 싫었다.
연약한 생각을 하며 도피에 가까운 여행을 했던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8년이 흐른 지금, 그 여행 덕분에 가슴속에는 소중한 보석을 품게 되었으니까.
이탈리아만 한 달 동안 한 바퀴 돌게 된 이유는 이탈리아 소도시라는 책 때문이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런 유명한 관광지 말고 정말 작은 마을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살아보고 싶었다. 목차를 보며 가고 싶은 소도시에 밑줄을 그었다. 오른쪽에 첨부된 여행 계획표가 철저해 보일 테지만 겨우 3일 치만 작성을 했었다. 그다음은 모든 것이 즉흥이었다. '한 바퀴 돌기만 하면 되지.' 하면서.
+ 이미 2013년도에 이탈리아를 포함한 프랑스, 영국, 스위스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갔을 때 가이드가 했던 말이 있다. "이 도시는 수중 도시라서 곧 잠깁니다. 잠기기 전에 한번 더 오세요." 이 말 때문에 한번 더 베네치아에 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리미니에서 만난 호스트와 게스트 이야기다. 여행을 시작한 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원래 베네치아에서 바리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가고 싶은 소도시가 마테라, 알베로벨로, 폴리냐노 아 마레, 이렇게 세 곳이었는데 모두 바리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바리를 가지 않고 중간에 꽂히는 도시에 내리기로 결정했다. 장시간 기차를 타는 것은 자신이 없었고 비용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그냥 기차만 타기엔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하루 종일 타야 했다)
눈에 띈 도시는 리미니였다. 세계에서 5번째로 작은 초미니 국가, 산마리노 옆에 위치해서 그랬던 것 같다. 가장 저렴한 기차표를 구해 리미니에 갔다. 리미니에 도착하여 산마리노 가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포기해야 했다. 산마리노를 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결론은 못 갔다)
4인이 사용하는 가장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를 찾았다. 그 방엔 나와 이탈리아 여자뿐이었다.(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점심시간에 한국에서 챙겨 온 동원 고추참치를 꺼냈다. 굉장히 아껴두었던 비상식량이었다. 매일 느끼하고 짠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하고 챙겨 온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파는 리조또용 쌀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밥을 해 먹었다.
나는 공용 식당에서 얌전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등장했다.
나에게 인사했다. "챠오!"
오늘 저녁에 게스트들과 바에서 술을 마신다고 한다. 시간 괜찮으면 내려와서 함께 술 한잔 하자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한두 푼 아껴야 할 사정이었는데 무료로 술을 준다니!
저녁이 되었다. 그냥 술을 준다는데 그냥 갈 수가 있나. 굉장히 아끼고 아꼈던 비상식량 중 광천 김을 꺼내 들고 내려갔다. 보이지 않았던 몇몇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보나 세라." 하며 앉았다. 네덜란드, 이탈리아, 덴마크, 러시아 등 정말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두 명이었는데, 나를 초대했던 주인의 이름은 '제이미'였고 다른 한 명은 '제리'였다. 자매는 아니었다. 제이미는 이탈리아인이었고 제리는 러시아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닉네임을 사용한 것 같다. 제이미는 보드카 한 병을 꺼내어 한 잔씩 따라주었다. 그리고 독한 술에 푹 절인 체리를 꺼내 주었다.
독한 술에 푹 절인 체리는 정말 독한 냄새를 풍겼다. 한 입 베어 물 수 없을 정도로 코 끝이 찡하여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체리를 먹으면 좋다던데. 이 체리를 먹으면 골로 가겠다 싶었다. 다른 게스트들도 그 체리를 먹는 것은 엄두 내지 못했다. 대신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듯 김을 꺼내보였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나는 정말 당당하게 소개했다. 이 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진정한 밥도둑이라고.
옆에 앉아있던 덴마크 남자가 말했다.
"나 떡볶이랑 불고기 알아. 여자 친구가 한국어 공부해. 그래서 한국 가보고 싶어."
정말 반가웠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한국 음식을 말해주다니! 옛다, 하며 김 한 장을 건넸다. 그 남자는 야금야금 정말 잘 먹었다. 구경을 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한 장씩 가져가 맛을 보기 시작했다. 짜지만 바삭하고 맛있다며 칭찬을 했다. 괜스레 으쓱했다.
그런데 그때, 김 한 장을 먹어본 네덜란드인이 소리를 질렀다.
"FUCK!!!! (대충 영어 욕)"
혓바닥에 달라붙은 김을 양손으로 뜯어내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앞에 놓인 체리를 몇 개나 집어먹었다. 온갖 욕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곤 자리를 일어나 떠나버렸다. 너무나 당황스러워 화조차 낼 수 없었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그렇지, 그렇게 욕하고 체리를 집어삼킬 일인가? 정말 매너 없는 인간이었다. 한국이었으면 신나게 욕해줬을 텐데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는 매우 짧았다.
그 네덜란드인 때문에 말도 안 되게 민망하여 정말 시무룩하게 앉아있었다. 앞에 서있던 제리가 수어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이상한 애인 것 같아." 옆에서 제이미가 통역을 해주었다. 제리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제리는 한국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은 것 같았다. 제이미가 통역해 준 뜻에 의하면 "네가 살고 있는 나라는 위쪽이야?"이었다. 북한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열심히 흔들며 X표 손짓을 했다. 그리고 설명했다. "나는 남쪽이야. 위쪽 사람들은 해외여행 못해." 물론 고위층은 가능하겠지만 일반인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못한다고 일반화시켜서 말했다. 나의 말을 알아들은 제리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또 당황했다. 왜 우는 것인지 물었다. 제리는 나의 물음을 듣고 제이미에게 말했다. "너무 불쌍하잖아. 정말 해외여행을 못 하는 거야?" 제이미는 동시에 통역을 해주었다. 그 이상을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앞서 말했듯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는 매우 짧았다. 매우 미안하지만 추가 설명을 하지 않았다.(못했다)
제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제이미는 "괜찮아. 원래 눈물이 많아."라며 남은 술을 모두 따라주었다. 제리는 수어로 제이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제이미도 말을 하며 수어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너무 가여워. 어째서 여행을 못하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갇혀서 사는 거야?"
"나도 가엽게 생각해.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그녀들의 대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술도 다 비웠겠다 한 명씩 자리에 일어났다. 나도 조용히 일어났다.
어렴풋이 지나가는 추억 속에 작은 행복이 모여있다. 지난 2015년도에 떠난 여행도 지금까지 품고 있는 것은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 행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캠핑이든 근교든 해외든 여행을 하면서 자꾸 찾으려 드는 것이다. 비슷한 행복을 느꼈다면 그 행복은 학습된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면 행복하구나' 하고 서서히 나를 알아가는 단계가 찾아온다. 나의 행복에는 피자뿐만 아니라 조미김도 있던 것처럼.
아, 그때 욕하고 갔던 네덜란드인. 단단히 한국욕이라도 해주는 건데! 내가 내 동생을 건들 수는 있어도 남이 내 동생 건드는 것은 못 참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이 싫어서 해외로 도망친 건데, 막상 해외에 나가보니 나는 김 하나로 어쩔 수 없는 애국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