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네가 무슨 다방 오봉년이냐?"
까만 네일을 덕지덕지 바른 손톱을 발견한 아빠가 내게 던진 한마디였다. 매춘부를 일컫는 전라도 사투리 은어를 겨우 16세 소녀에게 서슴없이 뱉는 아빠의 언행은 언제나 익숙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한참 사춘기 때 바를 수도 있지 딸한테 무슨 다방 오봉년이냐는 엄마의 음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빠. 그의 역정 끝엔 항상 따르는 한마디가 더 있었다. "한 3일은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나는 화장실에서 아세톤을 휴지에 흠뻑 묻혀 손톱을 박박 문질렀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까만 네일은 그대로 손톱에 얼룩이 졌다. 세면대에서 물을 트는 소리로 울음소리를 숨겼으니, 쓰레기통에 쌓인 휴지는 내 눈물을 훔친 휴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하필 엄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등어구이를 해주셨다. 아빠가 숟가락 드시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도 젓가락을 들어 고등어를 찢었다. 밥상 앞에서도 아빠의 훈계는 끝나지 않았다. "중간고사는 잘 봤냐." 꼭 그놈의 시험 성적은 어째서, 왜, 밥상머리에서 묻는 건지. 아빠는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듯 내게 물었다. 또다시 집안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에 수학 점수는 몇 점 나왔냐."
"87점이요."
"소희는?"
"92점이요."
"소희는 92점인데, 네는 왜 87점이라고 생각하냐?"
"실수 몇 개 했어요."
"실수?"
아무래도 아빠는 실수라는 단어에 꽂힌 듯했다. 아빠가 실수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말할 때 나는 비교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곱씹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소희는 같은 중학교로 입학했고 같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내가 소희의 수학 점수를 알고 있었던 이유는 아빠의 비교 대상을 미리 예측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럼 소희는 실수를 안 해가지고 90점을 넘겼는데, 네는 실수를 해가지고 87점을 맞았다 이 말이제?"
"네."
"네? 이 싹수없는 년이."
단호한 대답에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아빠. 엄마는 다음부터 잘 보겠지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를 썼으나 이미 아빠의 입에선 밥알이 튀고 있었다. 다방 오봉년에 이어 싹수없는 년 소리까지 듣자 나는 이성을 잃고 소리를 꽥 지르며 밥상을 엎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남육녀였던 아빠. 그중 아빠는 장남이었다. 위로 누나가 두 명이 있었지만 어릴 때 일찍 돌아가시고 다른 한 명은 환갑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마저 막내 고모가 태어나면서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오 남매를 혼자 키워야 했다. 할머니의 성격은 참 모나고 독했다. 배운 것이 없어 욕으로 자식들을 키웠고, 남의 집 논에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남은 볏짚을 모아 쌀알을 털어 모래 섞인 밥을 지었다. 아빠는 고등학교까지 겨우 다녔다. 다 찢어진 교복을 꿰매 입으며 점심에 굶주린 배를 수돗물로 채웠다. 소풍에 가는 날이면 할머니가 달걀 한 알을 삶아서 싸주셨는데, 그 달걀마저도 먹기 아까워 그대로 가져왔다고 했다. 먹지 않은 달걀은 동생들 몫이었고 그 달걀을 먹기 위해 동생들은 주먹다짐을 했다.
아빠는 성인이 되어 꼭 돈을 많이 벌어오겠노라 다짐했다고 할머니께서 이야기를 전했다. 택시기사, 주점, 막노동, 각설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58년생 개띠, 베이비붐 세대의 아빠는 30대 초반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 외화벌이를 했다. 딱 지금 내 나이 때 말이다. 사막 한가운데에 수로를 연결하는 일이었다. 한참 전쟁으로 폭탄이 떨어지기도 했고 방사능 피폭 위험도 있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돈을 가장 많이 주는 일을 선택했다. 아빠는 목숨과 맞바꿀뻔한 돈을 벌어와 그렇게 집안을 일으켰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룬 아빠 입장에서 까만 네일이나 바르는 87점짜리 딸은 참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고 싶어도 못했던 공부, 입고 싶어도 못 입던 옷, 먹고 싶어도 못 먹던 음식.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데 인생의 목표가 없어 보이는 내 모습, 아빠 눈에는 한심해 보였을까. 나의 식사 시간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과 네가 할 줄 아는 게 무엇이냐는 무시로 채워졌다.
아빠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늘 강조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인생의 청사진을 그려라. 플랜 A부터 플랜 Z까지 생각하고 움직여라. 용의 꼬리가 되지 말고 닭의 머리가 되어라.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업을 삼는 디자이너로 근 10년을 살아보니 이제야 아빠의 뜻을 어렴풋이 알겠다. 아빠는 끔찍했던 지난 시절이 자식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발버둥 친 거다. 그 마음을 알리가 없던 나는 지금까지도 마음에 상처를 입힌 아버지를 원수로 삼았다. 반드시 경제적으로 성공해서 아빠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지, 하며.
지난날을 되짚어보며 생각했다. 그저 아빠는 행복해지는 방법이 오로지 돈 뿐이라 믿는, 한 인간이었다. 다방 오봉년과 싹수없는 년은 할머니께 배운 미운 언어일 테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아빠는 내 밥그릇 위에 고등어를 찢어서 올려주셨으니까. 외식을 할 때도 남겨도 괜찮으니 부족하지 않게 음식을 주문하라 하셨으니까. 가지지 못한 자의 서러움을 달래는 방법은 오로지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 그리고 가족의 생계는 장남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내가 받은 압박감과는 별개로 차원이 다른 무게를 지닌,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집안의 기둥 그 자체였다. 이런 남자 옆에 어느 여자가 오래 붙어있을까. 자식인 나조차도 함께하기 버거워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떠났는 걸.
밥상을 엎은 그날, 아빠는 술에 잔뜩 취해 내가 다니던 수학 학원을 찾아갔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선생님들께 고급 초밥을 돌렸다고 한다. 어진이 잘 부탁한다며. 당시 사춘기 소녀가 아빠 마음을 알 턱이나 있었을까. 선생님들은 나에게 아버지께 잘해라 한 마디씩 하셨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마냥 창피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식탁 위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내게 성적을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