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괜찮아도 괜찮아
9살 때 떠난 엄마를 뒤이어 기꺼이 엄마가 되어준 사람이 있다. 두 번째 엄마와의 인연은 초등학교 5학년에서 시작된다. (이쯤이면 아빠라는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싶을텐데.. 뒤에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이기 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였을 시절에 나는 이 사람에게 딸기를 건넸다. 어린 아이가 집에 온 손님이라며 딸기를 씻어 건네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착하다고 생각했다나? 이 사람은 딸기를 건넨 나를 보며 엄마가 되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엄마가 되어준 후로 비루했던 아침 식탁은 바뀌었다. 항상 찌개나 국이 있었고, 반찬 투정이 심한 나를 위해 달걀 프라이를 해주셨다. 몇년간, 학교 끝나고 돌아온 텅 빈 집에서 혼자 차려먹었던 외로운 고등어 반찬보다 아주 낭낭하고, 풍성하고, 따뜻했다.
요리사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을까. 건강한 식단을 고집하는 엄마를 따라 주방에 자주 드나들었다. 주방 한쪽에는 늘 레시피 책이 놓여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만들지, 이 음식은 어디에 좋은지 조잘조잘 말씀하시는 엄마의 입모양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건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만드는 정성 자체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었으니까. 요리하는 모습이 엄마 같다면 나도 기꺼이 요리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졸업할 무렵, 요리사의 길을 걸었다. 겨우 20살에 실습 위주의 수업을 받으며 프라자 호텔로 일까지 나가게 됐지만, 불과 칼 앞에 13시간을 서있어야 하는 현실이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체력은 따라주지 않았고 군대같은 주방 문화에 겁을 지레 먹었다. 결국 요리를 배웠던 2년을 뒤로하고 다른 길을 걸었다.
1년을 방황하다 컴퓨터학원을 다니고 웹디자이너가 되었다. 디자인이라는 것, 꽤 재밌었다. 웹뿐만 아니라 편집, 더 나아가 로고도 만들며 브랜딩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으로 업을 삼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꿈꾸었지만 시각디자인 전공자만 뽑는 취업 시장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잘 하는 방향으로 밀고나가자,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요리사들 사이에서 전공자가 디자인일을 한다고 하니, 직업 이해도가 높은 덕분에 디자인 의뢰를 많이 받게 됐다.
하지만 이 일도 5년쯤 지나자 나를 너무 괴롭게 만들었다. 좋은 직장에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친구들과 비교가 될 때면 열등감에 사무쳐 고립된 생활로 이어졌다. '차라리 더 바짝 준비해서 취업할걸 그랬나?', '그냥 계속 요리할 걸 그랬나?', '프리랜서는 너무 불안정한데, 자격증 공부나 할까?' 자꾸 변하기만 하는 야속한 내 진로가 결국 무기력함으로 찾아와 술을 마시게 했다. '대체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마셨던 술은 하소연으로 둔갑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도록 만들었다.
나는 늘 엄마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걱정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과 정말 괜찮고 싶은 마음이 섞인 그런 대답. 엄마는 늘, 언제나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말을 했었다. 종종 어릴 때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엄마와 나의 인연이 그렇지 않은가. 아빠의 이혼으로 혼자 남겨진 외로운 아이, 앞으로 챙겨야 할 가슴으로 낳은 자식. 그것이 엄마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두렵기라도 한듯, 아무래도 내가 괜찮아야지. 엄마가 두번 다시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엄마의 물음에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엉엉 울고 말았다. 묵묵히 울음소리를 듣던 엄마가 말했다.
"힘들면 내려와."
'그래, 이렇게 있는다고 해결되지 않아. 잠시 쉬자.' 나는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꽤 오래 머물러 있을 작정으로 엄마가 있는 곳에 내려갔다. 아무래도 기댈 곳이 필요했나보다. 엄마가 사는 곳은 그리 외지지 않은 시골이었다. 까만 지붕이 쓰여있고 마당엔 멍청하게 생긴 똥강아지 한 마리가 묶여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며 나를 반겼다. 그날따라 하늘은 높았고 구름은 참 예뻤다.
나는 한적한 시골 공기에 취해 우쿨렐레를 꺼내 들고 띵까띵까 연주를 했다. 엄마는 팔을 앞 뒤로 크게 휘저으며 뒤로 걸었다. 마당에서 운동하는 엄마, 한량처럼 우쿨렐레 연주를 하는 나, 밥 주는 줄 알고 신난 똥강아지. 그 모습이 가라앉았던 나를 조금 들뜨게 만들었다.
"밥 먹자!"
매 끼니마다 건강하게 챙겨 먹던 어릴 적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산이 흐른 지금도 여전할까? 주방에서 요리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기저기 재료를 꺼내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직접 키운 애호박을 따다 채 썰어 야채 볶음밥을 만들었다. 그리고 노랗게 떠있는 달걀프라이를 볶음밥 위에 덮었다. 토마토와 달걀로 찜을 만들었고 미역 줄거리 볶음, 멸치볶음 그리고 김치를 내주었다. 단출했지만 영양가 가득한, 부족함 없는 식탁이었다. 쓱쓱 볶음밥을 비벼 한가득 입에 넣었다. 조금 짜지만 달달한 멸치볶음도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평소 간을 삼삼하게 하는 엄마표 볶음밥과 밸런스가 아주 좋았다.
너무 맛있었다. 정말 정말로. 그때 스쳐지나간 생각, 이게 바로 행복인가.
이때였다. 행복은 식탁 위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우걱우걱 밥을 먹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나 잘 못 먹고 다녀. 위장병 때문에 소화도 잘 안돼."
엄마는 레시피 한 권을 주며 말했다.
"야채수프 해 먹어라. 엄마도 속 안 좋아서 소화가 잘 안됐는데 야채수프 먹으니까 많이 좋아졌어."
매일 해 먹는 것도 지치고 배달시켜 먹는 것도 지겹다고 했다. 돈 벌어먹고사는 일만 아니면 여기 내려와 눌러앉고 싶다고 했다. 미주알 고주알 왜 그렇게 눌러담았는지 알 수 없었던 말들을 시원하게 꺼내었다. 입 안 한가득 씹고 있던 음식이 입밖으로 튀었고, 나의 투정도 입밖으로 튀었다. 엄마 앞에서 30살 먹은 어른 아이는 12살 먹은 어린 아이가 됐다.
"엄마 있잖아. 내려와서 살아."
엄마는 진지했다. 복잡한 서울 생활보다 더 복잡한 것은 사람끼리 부딪히며 사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우리 엄마. 엄마 말대로 결정을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말은 철부지처럼 내뱉었어도 나는 여기서 살 수 없다. 다 큰 성인이 징징거리며 엄마 치마폭에 파묻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집밥 생각나면 또 내려와."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2주 가까이 머물렀던 그 시간은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충분한 휴식을 주었고, 복잡했던 마음을 단단하게 정리하도록 도와주었다. 2주동안 알차게 차려준 엄마의 건강한 식탁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올라온 자취방에 반찬이 어디 있겠는가. 어김없이 저녁 식사는 밖에서 사 먹었다. 서울에 잘 도착했다는 안부 전화를 하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도착했다는 말을 하려고 하자 엄마는, "집밥 생각나면 또 내려와."
간단한 몇마디를 주고 받고 전화를 끊었다. 밥을 떠서 입에 구겨넣자 가슴팍에서 울컥, 무언가 올라왔다. 마치 엄마가 앞에 앉아있는듯 소리가 들렸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청승맞게도, 그 사람 많은 가게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슬퍼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나는 늘 괜찮아야 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란 안도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아도 늘 곁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안정감. 찰나의 순간을 행복으로 바꾸었기에, 분명하게도 행복해서 흘린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