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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May 08. 2023

밥을 먹는 건지 욕을 먹는 건지

하루 만에 직장에서 짤리고 두 달 만에 직장 그만둔 이야기

직업 전환에 과도기를 맛보는 요즘이다. 전공을 뒤로하고 브랜딩, 편집 디자이너로 20대를 지냈던 내가 30대가 되어, 이번엔 글 쓰는 일이 장기적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작가 일을 시작했다.(정확히는 작가지망생이다) 아름다운 단어만을 골라 시를 써서 전시하는 것도 좋았고, 있을 법한 재밌는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내어 책을 내는 것도 좋았고, 대본을 직접 써서 웹드라마로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좋았다. 내 안에 가진 공허함을 글로 풀어내며 내면을 더 단단하게 다지는 업은 결국 작가였을까, 마음이 시키는 삶의 방향성을 쫓고 있는 중이다. 마음이 가리키는 이정표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믿으며.


하지만 30대에 작가가 되겠다고 나서는 순간, 20대에 쌓아온 노력의 산출물을 부정해야 했다. 디자이너로 일 하면서 글을 쓰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본업이었던 디자이너 일을 서서히 줄이고 부업이었던 작가 일을 서서히 늘리기 위해서는 취업준비가 필요해졌다. 막상 취업 준비를 시작해 보니, 작가로 취업을 하기 위해선 전공, 공모전 이력 또는 교육원 이수 중 어느 것 하나? 도 아니고 많이 있어야 했다. 시각디자인 전공자만 찾는 취업 문턱보다 더 높았다.(요즘은 포트폴리오 위주이긴 하다)


작가로 이력을 쌓기 위해 공모전을 기웃거렸고 전공도 바꾸기 위해 편입 준비를 시작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들어가 기초반 수료 후 연수반까지 수료 예정이다. 하나씩 밟아가는 과정이라기엔 조급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일자리 어플을 켰다. 수많은 작가 공고엔 내가 가진 역량을 제대로 보여줄 회사는 보이지 않았다. 좌절하다가도 아니야, 난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응원을 스스로 외치며 롤러코스터를 타던 와중에 아주 꼭 맞는 회사를 찾고야 말았다.


찾았다면 잘 다니고 있을텐데, 왜 이런 글을 쓰느냐고? 결론은 나와 아주 꼭 맞는 회사에서 하루 만에 잘렸다. 그 회사는 디자인이 가능한 작가를 찾고 있었다. 직접 원고를 집필하여 디자인까지 작업하는 조건으로 많은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같은 창작자로서 창작을 존중하고 금전적으로 함께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 회사만의 제도였다. 신생 회사였지만 나름 규칙을 만들어가며 함께 성장할 직원을 구하고 있었다.


디자인 일도 포기할 수 없고, 작가 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내가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보름동안 밤잠 설쳐가며 만들었던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다. 회사에서도 딱 찾던 사람이었다! 바로 면접을 보았고 3일 만에 출근 날짜를 정하며 계약서까지 사인을 했다.


그런데, 왜 잘렸느냐고...

바로 겸업 금지 조항 때문이었다. 프리랜서로 오랜 시간 지냈던 나는 수많은 클라이언트와 소통을 하며 외주를 받았다. 장기간 고객이 쌓이다 보면 입소문 덕에 영업은 필요하지 않게 됐다.(작가 일을 시작한 지금은 아니다.. 슬프다..) 계약서를 쓰고 나서 외주를 받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3일 만에 이루어진 이 빠른 속도에 겸업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계약서를 이미 썼지만 출근 전날, "회사 다니면서 겸업 가능한가요?"라는 질문을 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에 문제가 있었을까? 다음날 출근 당일 회사로부터 고용 취소 통보를 받았다.


사실상 법적으론 직장인이 겸업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금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사 입장으로 보았을 때, 겸업을 할 경우 회사 업무에 지장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회사와 경쟁 구도를 이루는 부업을 할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특히, 디자인이나 작가의 경우 저작권 관련된 문제는 아주 예민하다. 요즘 유튜버가 회사 내 직장 브이로그를 찍으면서 발생하는 이슈도 한 예이다. 영업 비밀이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근로자 입장으로 보았을 때, 근무시간 외에 부업을 하는 것은 근로 제공 의무가 없기 때문에 위반 사항이라고 볼 수 없다. 근무시간 동안 노무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이니까. 쥐꼬리만 한 월급에 용돈벌이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겸업을 허용하는 회사도 있다. 바로 필자가 프리랜서가 되기 전, 근무했던 전 직장. 그 회사는 오히려 겸업을 독려하며 사이드 프로젝트를 제안하기도 했다. 아마도 새로운 일에 흥미를 쉽게 가지는(?) 대표의 성향도 한몫했을 것이다.


출근 전날,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드디어 작가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인가! 하며 설렌 마음에 잠을 설쳤다. 하루 만에 잘린 회사에서 조금의 대화도 없이 해고 통보를 한 것이 약간 억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 받아들이는 중이다. 나라는 사람이 유일하듯, 회사가 가진 특징도 다양할 테니까. 나와 잘 맞는 회사를 찾는 일도 어렵지만, 회사도 잘 맞는 인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간 프리랜서로 많은 대표와 일을 하며 어떤 일을 겪는지 그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알기에.


결국 나는 다시 면접을 보게 되었고 집에서 자가로 15분 정도 걸리는 새로운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이 회사는 글을 쓰는 회사가 아닌 순도 100% 디자인만 해야 하는 회사였다. 면접은 깔끔했다. 유쾌해 보이는 면접 담당자가 "너 나의 동료가 되어라."처럼 나를 쏙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또 하나 다행인 것은 작가로서 새로이 꿈꾸는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는 것. 회사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 꼭 꿈을 가지고 다니라는 담당자의 말에 더욱이 이 회사에 들어오고 싶었나 보다. 게다가 업무 환경이 너무나 베스트였다. 커다란 창에,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자리에, 푸릇푸릇 내가 좋아하는 담쟁이가 건물 외벽을 한가득 감싸고 있었다. 어차피 출근을 해야한다면 근무환경도 매우 중요하지! 그리고 이 회사에 들어오며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점심시간! 주변에 맛집이 너무 많아서 점심시간마다 맛집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아, 역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어.


점심 시간마다 먹은 점심 메뉴


직장인에게 점심 메뉴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점심시간만 즐거워도 회사는 다닐 맛이 난다고! 매일매일 겹치지 않는 메뉴에 칼퇴가 보장된 회사. 작가로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디자이너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 최상의 만족도를 자랑하며 신나게 회사에 적응을 해다갈 무렵, 이런 멋지고 행복한 회사 생활도 잠시 회사는 숨겨왔던 본모습을 드러냈다.


일이 많냐고? 너무 없어서 심심하다. 월급을 떼어먹었냐고? 매출도 아주 좋은 회사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느냐, 바로 다이렉트로 일하는 상사가 문제였다. 그렇다. 나를 면접 봤던 그 사람이다. 그는 점심 먹을 때마다 자리에 없는 직원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부하 직원에 대한 냉정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이끄는 팀이기 때문에 책임을 다한다는 뉘앙스를 항상 풍겼으니까.


그 모습을 그대로 믿은 내가 어리석었다. 분명 면접에서는 나이스한 모습이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MBTI는 T이기 때문에 맞는 말만 한다며 팩폭을 넘어 무례에 가까운 평가를 했다. 그것도 점심을 먹을 때마다. 한 번은 퇴사한 직원에 대한 흉을 보고, 한 번은 월요일에 연차를 쓴 직원을 흉보고.


분명 점심시간마다 먹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밥을 먹는 건지 욕을 먹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게 됐다. 서서히 그 상사와 점심을 함께 하는 것을 기피했다. 그러다 모두가 출장을 가고 남은 사람끼리 점심을 함께 하게 됐는데, 내가 퇴사를 해야겠다 결심한 결정타를 날렸다. 이번엔 일면식도 없는 내 친구 흉을 봤다.


직원 : 저 올 해에는 꼭 연애하고 싶습니다. 소개팅 꼭 시켜주셔야 해요!

상사 : 야. 지금 네 사정에 무슨 연애야. 정신 차려.

나 : 사랑은 늘 하고 살면 좋죠. 제 친구 해드릴까요?

직원 : 오, 누구 있습니까?

나 : 네. 집 있고 차 있고 직장 좋은 여성이죠.

상사 : 그런 애가 쟤를 왜 만나.

직원 : 정말 저 해주시는 겁니까?

나 : 친구가 요즘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 있어요. 다이어트하고 소개해드릴게요.

직원 : 에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제가 또 자존감 지킴이죠!

상사 :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으면 딱 하는 거지. 살찐다고 무슨 자존감이 낮아져. 그런 애들은 나약하니까 그런 거야. 본인한테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봐야지. 자, 나 봐. 술 안 먹는다고 한 날부터 지금까지 안 먹잖아.

직원 : 살찌고 자존감 낮아질 수도 있죠, 왜 그러세요~

상사 : 난 T라서 팩트만 말해. 그런 애들은 살 절대 못 빼.


나는 이 회사를 다니며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거기에 친구 흉까지 보다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욕은 상사가 했는데, 먹기는 내가 먹었다. 말은 내가 뱉었는데, 욕은 친구가 먹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T발놈이세요?'를 꾹 눌러 담기는 어려웠다. 점심 시간에 나눈 이 대화는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보름 뒤에 퇴사 통보를 했다. 수습기간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날짜까지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됐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지만 작고 귀여운 월급을 위해서라도 보름을 마저 더 채우고 퇴사했다.


그 상사는 나에게 물었다. 퇴사하는 이유에 본인도 있냐고. 나는 너만 없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남겨진 직원들에게 또다시 내 욕을 하며 귀찮게 할 테니까.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고 두 달 만에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왔다. 


이러한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프리랜서로 지내온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나는 퇴사를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들처럼 안정적인 직장에 오래 머물며 경제적 활동은 못해도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환경은 쉽게 걷어찰 수 있었다.


일상을 위협하는 사람을 곁에 오래두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언젠가 유통기한은 다 되어 서로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생산적인 활동에 남을 험담하며 행복을 갉아먹는 사람은 하루빨리 치워버리는 것이 좋다. 나를 위해서 말이다.


'차라리 더 바짝 준비해서 취업할걸 그랬나?', '그냥 계속 요리할 걸 그랬나?', '프리랜서는 너무 불안정한데, 자격증 공부나 할까?' 걱정 근심 가득했던 나의 프리랜서 인생. 여기저기 중심없이 떠도는 뿌리없는 사람이라고만 여겨졌는데, 이제는 나의 행복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 번외 이야기
퇴사 후, 눈 뜨면 나약하게 소파에 드러눕는 나 자신이 싫어서 소파를 작은방에 옮기고 작은방에 있던 책상과 컴퓨터를 거실로 빼두었다. 소파는 3인용이었고 책상은 진심 무거운 1800짜리. 작은방은 문화교실센터가 되었고 거실은 프리랜서 사무실이 되었다. 그 덕에 나는 담이 왔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어찌 아픈 곳만 콕콕 찔러서 침을 잘 놓으시는지, 지난날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 상사의 말 같았다. 스트레스 지수도 체크했다. 결과지를 들고 한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더니, “여기 오시는 환자분들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데 본인은 스트레스가 제로에 가까우시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퇴사했거덩요." 선생님은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스트레스를 날리는 한방은, 침이 아니라 퇴사라는 걸 선생님도 아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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