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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Oct 21. 2023

연애에도 시식이 있다면

밍밍하고 따뜻한 맛으로 주세요

헤어진 그를 생각하다 달걀프라이를 태웠다. 까맣게 그을린 프라이팬을 보니 내 마음도 이렇게 타들어갔을까? 혼자 먹는 밥이 너무 외롭다. 억지로 반찬을 밀어 넣다 목구멍에 걸렸다. '콜록콜록' 그도 내 생각이 걸려 목구멍이 따가울까. 그랬으면 좋겠다. 소화되어 없어지는 그이기를 바라며 설거지를 했지만 주룩주룩 싱크대에 물이 차오를 뿐이었다. 가득하게 끼어있는 음식물 찌꺼기는 그동안 품고 있던 슬픔이었을까, 아픔이었을까. 배수구에서 고약한 악취를 뿜어낸다.


그는 나 몰래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했다. 사진첩 속에 몰래 숨겨둔 식사 사진을 보고 알았다. 나는 추궁했다. 핸드폰 봐서 미안하긴 한데, 나에게 말도 없이 언제 이런 근사한 저녁을 가졌어?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와는 늘 집에서 밥을 해 먹었다. 아무리 내가 요리를 좋아한다 해도 그렇지, 숟가락 하나 놓을 줄 모르는 그를 왜 사랑했을까. 이제는 나를 위한 저녁을 차려야지.


마트에 갔다. 식품 코너에선 다양한 시식 행사를 하고 있었다. 파스타, 잔치국수, 삼겹살, 버섯까지 구워준다. 배가 고플 때 마트에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배가 고프기보단 사랑이 고팠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던 사랑 대신에 냉장고라도 채울 생각이었다. 


파스타 시식 코너 앞으로 갔다. 로제 파스타 소스를 팔고 있었다. '이 한 병이면 둘이 먹기에 충분하겠다' 생각한 순간, 아차 싶었다. 이제 나만 생각하기로 했는데. 맛을 보고 사고 싶었다. 작은 종이컵에 담긴 로제 파스타를 입 안에 훌훌 털어 넣었다. 너무 뜨거워서 혼났다. 입안이 데어서일까? 생각보다 밍밍한 로제 소스였다. 로제 파스타 소스를 사면 파스타 면도 함께 준다는 판매원의 말에도 나는 뒤돌아섰다.


삼겹살 코너에 갔다. 노릇노릇 구워지는 꽃삼겹. 칼집 조금 냈다고 이름이 꽃삼겹이라니. 나도 칼 좀 대면 예뻐지려나? 마트는 7시쯤 오는 것이 좋다. 막바지 할인 행사를 하기 때문이다. 40%나 할인 행사를 하는 삼겹살 가격을 보면서 대체 얼마나 남겨먹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마트에서 구워주는 삼겹살은 참 맛있는데, 집에서 구워 먹어 보면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식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초록색 이쑤시개로 잘게 잘라진 삼겹살 한 점을 집어먹었다. 역시 기대를 지지 않는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파격적인 할인가에 의심스러워 삼겹살을 사지 않았다.


평양냉면 코너에 갔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는 그 평양냉면. 나는 한 번도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궁금했다. 어떤 맛일까. 판매원이 담아주는 평양냉면을 파스타를 먹었듯이 입 안에 훌훌 털어 넣었다. 시원하고 정말 밍밍한 맛이었다.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물었다. "하나 더 먹어도 돼요?" 또 한 번 입 안에 훌훌 털어 넣었다. 파스타에 데었던 입천장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담백하고 삼삼한 향이 코끝으로 올라왔다. 따뜻하게 해 먹어도 맛있다는 판매원의 말에 평양냉면을 집어 카트에 넣었다.


정말 따뜻하게 해 먹어도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손은 가겠다 싶어 골랐다. 문득 나를 두고 바람을 핀 그가 떠올랐다. 그는 빨간 양념이 덕지덕지 발라진 매운 양념갈비 같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매운 것을 먹는다고 한다. 매운맛의 매력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한다. 조금만 매워도 엉엉 울어버린다. 처음부터 그가 매운 양념갈비 같은 사람인 줄 모르고 만났다. 만나다 보니 맵고 나쁜 남자였지. 


시식 코너처럼 연애도 미리 맛보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미리 매운맛인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직 포장지도 뜯지 않았으니 반품이라도 했을 것이다. 차라리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평양냉면 같은 사람을 골랐을 거다. 적어도 나를 울리지는 않을 테니까. 차갑든 뜨겁든 먹다 보면 그 담백한 매력을 알고 밍밍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테니까.


집에 돌아와 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를 정리했다. 텅텅 비어있던 냉장고가 제법 찼다. 평양냉면은 따로 빼두었다. 물을 끓이고 육수를 데웠다. 따뜻하게 해 먹어도 맛있다는 판매원의 말에 기대를 걸었다. 예쁘고 큰 둥근 그릇에 면을 넣고 데어진 육수를 부었다. 식탁에 평양냉면 한 그릇을 놓고 수저 젓가락을 놓았다.


앞에 나란히 앉아 먹을 사람은 없지만 평양냉면 한 그릇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이 음식 하나로 식탁이 가득 채워지다니. 수저로 국물을 떠먹었다. 마트에서 먹었던 시원함과는 달리 녹진한 향이 퍼졌다. 누가 평양냉면이 삼삼하고 네 맛도 내 맛도 아니라고 했는가. 매운 맛으로 크게 혼났던 나는 평양냉면으로 달랠 수 있었다.


연애도, 일도, 가족도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있나.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 뿐. 


만약, 연애에도 시식이 있다면 나는 평양냉면 같은 사람을 고를 것이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차가워도 따뜻해도 한결같이 밍밍한 그런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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