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이라는 프레임
철석같이 엄마라고 믿었던 사람은 친엄마가 아니었고,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키운 아빠는 행복보다 성적이 먼저였다. 가슴으로 품어준 남에게 엄마라는 명분을 심었고, 한참이나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동생은 어느새 나보다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나만 바라보는 줄만 알았던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눈길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좋은 직장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인간관계의 벅참을 느꼈다. 가족도, 회사도, 사랑도, 친구도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이 있지 않은가.
그동안 타인에 의해 식탁 위의 행복을 찾았다면 오늘은 나를 위한 행복을 찾아볼 생각이다.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인센스를 태우며 좋아하는 엘피를 듣는다. 소파에 누워 책 한 권 읽는 시간을 가질 때면 온전히 나를 위한 세계가 펼쳐지는 기분이다. 게다가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이라니.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몬스테라 잎을 볼 때면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창문을 활짝 열어 청소기를 돌렸다. 러그 밑에 깔린 머리카락도 치운다. 오랜만에 솜이불 빨래도 하여 옥상에 널어둔다. 싱크대에 쌓인 음식물 찌꺼기도 버리고 인덕션 주변에 붙은 기름 때도 쓱쓱 닦아준다. 어지럽혀진 냉장고 안, 반찬통까지 정렬로 맞춰두면 지금까지 청소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하루 세끼 밥을 챙겨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굳이 세끼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든든한 한 끼만 있어도 뱃속은 편안해진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반찬,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고등어구이를 냉동실에서 꺼냈다. 조리법을 보면 전자레인지에 1분 완성이라고 쓰여 있지만, 나는 손이 조금 더 가더라도 프라이팬에 구워 먹어야겠다. 아! 달걀 프라이를 먼저 구워야 한다. 달걀 프라이를 굽고 고등어구이를 튀겨야 생선 비린 냄새가 스며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서니사이드업을 좋아한다. 반숙이라고 부르는데, 노랗게 뜬 달걀노른자가 마치 해가 뜨는 모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엄마가 애호박 볶음밥을 해줬을 때 올려줬던 그 달걀 프라이이다. 달걀프라이지만 튀기듯이 굽는 게 포인트이다. 그리고 절대 뚜껑을 덮지 않아야 한다. 뚜껑을 덮으면 프라이팬 안에 열기가 노른자 겉면을 살짝 익히게 되는데, 그 모습은 안개가 잔뜩 낀 태양 같아서 예쁘지가 않다.
달구어진 기름 위에 달걀을 깬다. 치-직, 달걀의 엣지부터 기포를 만들며 익기 시작한다. 기름과 달걀의 수분이 만나게 되면 탁- 탁 튀게 되는데, 이때 절대 온도를 낮추면 안 된다. 튀기듯이 굽는 것이 포인트이기 때문! 살짝 불안하다면 프라이팬을 위로 들어 불과 거리를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달걀 프라이 밑에 갇힌 기름은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이다. 기름이 튈 때마다 리듬에 맞춰 달걀도 춤을 춘다. 그때 프라이팬을 들고 빙글빙글 돌려준다. 달걀 프라이 밑이 눌어붙지 않도록 말이다. 서서히 익어갈수록 달걀의 가장자리는 갈색으로 노릇노릇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다. 밑면도 갈색으로 노릇노릇 변했을 타이밍! 새 그릇은 꺼내지 말기로 하자. 밥그릇 위에 올려서 설거지감을 줄이기로!
나는 약간의 편식을 한다. 딱히 입맛에 맞는 반찬이 없었기에 어릴 적 혼자 고등어 반찬을 주로 해 먹었었다. 고등어를 아주 좋아하지만, 고등어의 푸른 등껍질은 싫다. 특유의 비린내가 난다고 해야 할까? 흰 살을 제외한 붉은 부위는 왠지 더 먹기 싫다. 그래서 코코넛 오일을 잔뜩 두른 후, 프라이팬 온도를 높인다. 스모킹 포인트라고 아는가. 프라이팬에서 연기가 살짝 올라오면 그때 재료를 넣는 것이다.
스모킹 포인트, 타이밍이다. 적절한 온도에 적절하게 고등어를 넣는 것. 인생에도 스모킹 포인트처럼 '지금이 행복이야!' 하고 알려주는 신호가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다면, 행복은 식탁 위에 있다는 사실을 30년 넘게 찾아 헤매지는 않았을 텐데. 코코넛 오일, 실은 식물성 포화지방산(중쇄지방산)을 고온으로 가열하면 딱히 몸에 좋지는 않다. 그냥 고등어와 코코넛 오일의 만남에 있어 건강한 식단이라며 스스로 세뇌를 시키는 것이다. 코코넛 오일의 고소한 향이 신기하게도 고등어의 잡내를 잡아주기도 하여 이런 식으로 많이 조리를 해 먹는다. 나는 맛이 먼저인 게다.
제일 먼저 싫어하는 등껍질을 기름에 자글자글 튀긴다. 정말 튀기듯이 굽는 것이다. 높은 온도 때문에 고등어 등껍질이 기포처럼 올라오는데, 꼭 얇은 치킨 껍질을 기름에 풍덩 튀긴 맛이 난다. 흰 살 부위도 마찬가지다. 그 부위가 갈색으로 노릇노릇 변할 때까지 프라이팬에서 연기가 나든 말든 계속 굽는다. 갈색으로 노릇하게 구워낸 고등어는 바삭바삭한 식감을 가지게 되는데, 산폐 된 코코넛 오일 덕분에 바비큐 같은 고기 뜯는 맛을 낸다. 물론 몸에 좋지는 않다. 서랍에 하나 남은 김을 꺼냈다. 고모가 보내주었던 김치도 썰어서 접시에 담았다. 냄비째 넣어뒀던 김치찌개도 꺼내어 보글보글 다시 끓였다. 김치찌개는 끓이면 끓일수록 맛있다. 모든지 시간을 투자해야 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조촐한 밥상이 완성됐다.
'잘 먹겠습니다!' 외치기 전에, '지금이 행복이야!'하고 스모킹 포인트 하나를 알려주겠다. 반찬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반찬이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매일 같이 반복하는 스쳐지나가는 일상이지만, 잊지말기로 하자. 이 식탁 위에 놓인 식사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다. '당연히 먹고살아야 하니까 먹는 거지.' 대신에 식탁이라는 프레임에 행복을 집어넣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행복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