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임신에 대한 기록 #5 엄마
임신을 하게 되면 '나의 엄마'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나를 낳아준 엄마와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무한한 유대감과 많은 의문이 피어난다.
원래 무뚝뚝한 편이었던 나는 임신을 하고 엄마와 통화가 잦아졌고,
유년시절 타이거맘에 가까웠던 엄마도 어느새 할머니가 될 준비를 완료한 세상 부드러운 여자가 되어있었다.
출처: 헬스조선
내 기억속의 엄마는 아늑하고 안온하지만 무언가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늘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많은 점이 서로 달랐지만 욕심쟁이인 점만은 비슷했다.
진취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을 지향하며 스스로의 욕구에도 그 시대 사람들 치고는 솔직했던 그들은
전주를 벗어나 서울에서 무언가 해보겠다고 합심하여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했다.
지금도 혼자 window를 설치하고 스마트폰으로 장외주식 거래를 하며
10년 째 거주하는 빌라의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엄마는 늘 일을 하고 있다.
젊을 때부터 이모의 화장품 가게를 봐주며 열심히 돈을 벌어 아빠를 내조했다.
50대 초반부터는 임기제 공무원으로 10년이 넘게 일했다.
그 와중에 딸 둘을 신촌의 좋은 대학에 보낸 게 그녀의 큰 자랑거리였다.
반면 아빠는 꿈이 많은 사람이지만 실속은 없었다.
10년 동안 찬란한 직장생활을 한 이후로 정치에 실패하고 사업을 일으켰지만
집에 적절한 수입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다정다감한 사람이지만 불우했던 가정환경 탓에 표현은 서툴렀다.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보였나보다.
늘 무언가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
출처: 픽사베이
올해 1월에 공무원 은퇴를 한 63세의 엄마는 처음으로 일이 없었다.
여러 주식과 코인 거래를 소소하게 하며 원래의 월급을 일부 보전하느라 바쁘다는 소식을 전해왔지만
(그렇다 우리 엄마는 90년대부터 장기 시장에서 이기고 있는 아주 소수의 개인 중 하나다)
나는 늘 알고 있었다.
엄마는 참으로 가족적인 사람이라서
아빠와 우리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 낙인 사람이었다.
그만큼의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마다 욕구불만을 느꼈지만
그래도 또 다른 가족들을 편하게 해주고 하고 싶어서 여러 궁리를 하며 소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우리집의 가장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아빠도 사회적으로는 매우 번듯하고 훌륭했지만
그는 대부분 가족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픽사베이
그렇게 또 여러 궁리를 하던 엄마는
갑자기 베이비플래너 자격증을 땄다며 내게 사진을 보내왔다.
그리고 여러 유튜브 아기들의 영상과 사진도 보내왔다.
아기가 생기면 본인 집에서 봐줘야 한다고 퀸사이즈 침대 프레임을 버렸다.
나도 아기를 가질까 고민하던 23년의 시작에
참으로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손주가 찾아왔다.
임밍아웃을 한 동영상을 보면 엄마가 처음 내뱉은 말은
'어머.. 진짜? 너네는 복이다. 복받았다' 였다.
아마 마음속에서 노산인 내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셨던거 같다.
출처: 픽사베이
그래서 우리 아기의 탄생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의 순서를 꼽자면 나=남편>엄마>기타 가족이었던것 같다.
이런 맥락 속에서
임신 생활 중의 여러 논의 끝에 우리 부부는 친정으로 합가하기로 결정했다.
엄마의 적극적인 어필과 그에 호응하는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와
처음에 여러가지 경로로 불만을 표시했다가 늘 그렇듯 의견이 없어진 아빠와
3-4개월 간의 신중했던 나의 고민(...in processing...)의 결과다.
두 집을 합치기 위한 가구 배치에 대해 여러 차례 회의를 했고
남편은 금쪽같은 출산휴가를 내가 조리원에 있는 기간 동안
이사와 박사논문 마무리에 소비하기로 했다.
독일에 있는 친동생을 포함해 많은 지인들이
어떻게 친정 엄마와 합가하냐며 혀를 내둘렀지만
나와 엄마의 관계를 꽤 잘 이해하고 있는 남편은 여러 근거를 들며 괜찮을 거라는 판단을 해주었다.
나 역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아이를 포함한 모두를 위해서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무척 고마운 일이다.
출처: 픽사베이
엄마가 가장 행복한 시기는 바로 지금부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다.
딸 둘을 든든한 사위들에게 보내고 큰 걱정 없이 손주를 키우기 시작하는 시기.
사람들로 복작복작한 집안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시기.
동생도 아빠도 알고 있었다.
동생은 '언니 진짜 효도하는거야'라고 말했고
아빠는 이제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한달에 최소한 얼마를 받아야 한다' 거나 '나의 공간을 지하실에 따로 마련해달라'와 같은 흰소리를 멈췄다.
한국에 올 때마다 우리집에서 머무는
외국인인 나의 제부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10년동안 그녀는 너의 아이를 키우는 취미(hobby)를 즐기며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거야.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남편은 취미라는 표현에 발끈했지만 역시 동감했다.
그는 지금도 '사랑이 넘치는 우리집' 프레임에 단단히 갇혀있다.
뱃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때마다 꼭 그 얘기를 넣는 걸 보면 그렇다.
"미니야, 너는 태어나면 온 가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을 거란다"
#임신출산 #친정합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