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에 대한 기록 #1

내뜻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by 리키디티


어느새 출산을 10일 앞두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남기기 힘들 것 같아서 미루고 미루다 접어두었던 브런치에 접속한 일요일 새벽 5시 40분.


돈을 받고 글을 읽고 쓰는 일이 버릇이 되면서


오히려 내가 좋아하던 글읽기 그리고 글짓기와 멀어져버린 지난 몇년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만큼은 지금 적어야 한다는 생각이 몇달간 내 머릿속을 맴돌아서 더이상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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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에 대한 기록 #1 내뜻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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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은 여자의 인생에 '너는 여자야' 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로 등장한다.


아름답게 포장될 때도 많았다.


보통 교과서에 그려진 이런 그림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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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23RF






나한테 임신이 처음 내 일로 느껴진 건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캔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했을 때 같다.


겨울 날 매점을 다녀오는 길에 따뜻한 캔커피를 쥐고 좋아하던 나에게


나중에 아기를 가졌을 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캔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말하던 친구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웃길라고 하는 말인줄 알고 빵터진 나에게 진지하게 정말이라고 말했었는데.. 지금 다시 블로그에 문자화해보니 더 충격이다.



별개로 고등학교 때까지 받은 성교육은 아무리 자세하고 배려가 넘쳐도 그닥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연약한 자아 때문에 온갖 통념에 가장 강하게 사로잡혔던 시기였던 10대에는


성교육이란 무언가 불편해서 그 반대급부로 낄낄거리고 넘어갔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어떤 불편한 일이 있으면 기꺼이 우회하는 상황을 만드는 강한 회피형 인간인 나로서는


부모님께 성 관련 문제를 물어본다 뭐 이런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캔커피를 마시지 않는 일처럼


임신의 가능성은 여자에게 무언가 조심해야 한다는 일이었다.


대학에 오니 그 위험은 연애할 때 더욱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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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BN



20대에는 임신의 가능성이 위험이자 공포로 점철되었다.



요새 유행하는 고딩엄빠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처럼 나의 아이덴티티를 엄마라는 역할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즐겁고 때로는 거지같았던 연애들을 진행했고


동시에 내 커리어도 잘되는 듯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무지개색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대던 20대의 시간에


임신이란 건 모든 것을 중지시키고 미지의 세계를 열어버릴 것 같은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유약하고 의존적으로 변해버릴 것 같은


그런 매개 단어로만 존재했다.



그러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고


나는 내 곁에 있던 사람과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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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짱구






결혼은 달콤했다.


나와 남편은 서로의 성역할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의 성격만큼 서로를 즐거워했다.


연애때와 마찬가지로 휴일 밤을 함께 술처먹고 망가지는 걸로 지새웠고


둘 다 대외적으로 조신한 이미지와 달리 엉망진창인 모습들을 공유하면서 (꼭 술먹고 그런건 아니었다) 돈독하게 지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름답진 않았지만 많이 애틋했다.



반면 아이에 대한 의견은 처음부터 대립했다.


나의 기조는 아이가 행복한 인생에 대한 절대 변수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는데


그는 본인이 아이를 태어나기 위해 지구에 왔다며 눈물을 보이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할 때 아이 이야기는 4년이 지나면 하기로 유예했다.


4년은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내가 더이상 커리어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최소 시간이었다.



결혼 후 안정이 되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졸업과 포닥과 연구기관 정규직 박사취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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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파이더맨






그리고 2023년이 와서 아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남편은 의외로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아직 안정이 안된 본인의 커리어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생각보다 충만했던 아이 없는 결혼생활의 합작이랄까.


귀엽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래, 둘이 살자. 뭐 어때. 세상은 넓고 놀 것은 많다.


다만 4년동안 착장해왔던 오래된 피임기구는 이제 부작용이 너무 심하니 일단 빼고.


(4년 전 유행했던 #임플라논 은 이제 부작용으로 인해 시술해주는 병원도, 이걸 제거해주는 병원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기가 생겼다.



그렇게 바로


너무 바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로



언젠가 난임을 걱정했던 만 35세의 나와 만 37세의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놀다가 (검사 이틀전 티비 앞에서 소주와 맥주를 들고 해드뱅잉을 하는 남편의 동영상이 있다..)


거의 7주가 다 되어서야 산부인과에서


피임기구를 제거해준 의사선생님의 당황한 목소리로 아기의 심장소리를 소개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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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






얼떨떨하게 병원을 나왔던 게 3월 말이었으니까


이제 7개월이 흘렀다.



피임기구를 뺄 때 아예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평균적으로 6개월이 걸린다고 했으니


조금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한번 결정의 기회가 올 줄 알았다.


그땐 더 진지하게 얘기해보려고 생각했었다.


우리 인생의 가치관과 새로운 계획에 대해서 엑셀 sheet 한번 정도는 더 만들 줄 알았다.


(그렇다 나는 인생 엑셀이 있다)



육아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어왔다시피


아기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찾아와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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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터파크






아직 조금 차가웠던 공기가 생각난다.


서울에서 원주로 가는 버스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많은 상념들이 생각난다.


연구실에서 멍때리며 바라보던 원주의 맑고 깨끗한 풍경이 기억난다.


조금 빠른 승진 기회가 찾아왔지만 예의바르게 거절하고 돌아나오던 어느 평일 오전의 회사 복도와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클릭하던 어느 지방출장 신청서가 띄워진 모니터와


파워 검색으로 찾아보던 임신 초기 해야할 일들과 (왜 해야할 일들이었을까...) 자꾸 팝업되던 귀여운 아기 사진들



10대와 20대에 어렴풋이 위험과 공포로 다가왔던 임신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내 인생에 자연스럽게 깨야할 퀘스트처럼


서슴없이, 그렇지만 부드럽게 내 뱃속에 놓였다.



내 계획대로 되진 않았지만 예상보다 기쁜 마음이 들어 놀라웠다.


살짝 접혀있는 내 뱃살 속에 작은 생명이 깃들었다는 사실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첫 한두달은 너무 좋아서


둘도 셋도 낳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였다.


(지금은 다시 모르겠다 ㅋ)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상상해본


엄마가 된 나의 모습이 무척 행복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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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양시






다행히 남편의 마음도 비슷했던 것 같다.


우리는 언제 둘만 살자고 했냐는 듯 신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거짓말처럼


그 후로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았다.


그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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