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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Sep 11. 2022

책 읽는 페미니스트 아시아인 여성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⑥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정말 재밌는 건 차별을 불편해하는 사람보다 차별을 말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을 보고 "누가 이런 소수자한테 완장 채워줬냐?"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차별 자체보다 차별을 말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폭력보다 폭력을 고발하는 것을 성가셔하는 사람이고 분통함이나 억울함이나 부당함 그 자체보다 그것을 뒤집으려는 움직임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를 포함한 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게 있다. '소수'라는 단어의 뜻에 가치가 작다는 의미가 있는 줄 아는 것이다. 상대적 관념 때문일까. 소수는 그와 반대되는 것에 비해 크기나 규모가 작거나 적을뿐 그 자체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특히 감정 같은 것은 말이다, 절대적 영역의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에세이 같은 말이지만 (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저 사람보다 덜 웃는다고 해서 내가 덜 행복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보다 더 운다고 해서 내가 더 우울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감정은 내 안에서도 절대적으로 이루어진다. 어제보다 두 번 더 웃었다고 오늘의 내가 더 낫다는 보장이 되진 못하며 작년보다 열 번 더 울었다고 해서 올해의 내가 더 좋지 않다는 확신을 갖기엔 이르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는 웃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다르고 우울을 감당하는 마음가짐도 다르기 때문에.


소수자 혹은 소수 집단은 그들이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저평가된다. 저평가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그들의 억울함이나 분통은 개선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불편함'이 된다. 소수에게 비극은 당연한 것이 됐다. "그 소수 집단이~"라는 서두는 이미 부정적 분위기를 띄우고, 심지어 소수 스스로가 말하는 소수 또한 "난 소수잖아"라며 굽히거나 숙이거나 움츠리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미 작고 작은 소수를 더 작고 작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소수적 감정은 우리가 까다롭게 굴려고 마음먹을 때 -다시 말해 솔직하려고 마음먹을 때- 배어나는 감정이라고 비난받는다. 소수적 감정이 마침내 표출되면 적대, 배은망덕, 시샘, 우울, 공격의 감정으로 해석되며, 백인들이 도가 지나치다고 여기는 인종화된 형태가 그런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중에서



유색인종은 얼마나 더한 무시를 당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민자는 얼마나 더 배척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을까. 여성은 얼마나 더 차별 당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 특히 아시아인은 특히 자주 망각한다. (캐시 박 홍처럼 이민자라는 상황이 아닌 이상) 우리는 차별받은 인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인종을 감싸거나 그들의 자유를 먼저 나서서 외쳐준다. 뭐랄까.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있는 기부 천사 같달까.


자전을 바탕으로 한 고통, 차별, 부당한 대우에 대해 고발하는 책이 주목을 받을 때마다 커다란 헤드라인 옆에 함께 뜬 작가의 얼굴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가장 자주 본 건 흑인 여성이었고 가끔씩 인자한 대학교수 같은 백인 여성이었다.

자연스럽게도, 애석하게도, 당연하게도, 서글프게도 아시아계 여성 작가는... 글쎄. 세계적인 매거진에서 주목하고 문학상을 수상하고 저널리스트나 학자들에게 찬사를 받는 아시아계 여성 작가의 책, 그런 것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더 많이 알려지고 읽혔다. 그들을 평가한 매거진, 문학상, 저널리스트나 학자들은 거의 100%의 확률로 미국 혹은 유럽 단체 혹은 사람이다. 아이러니하다. 백인들로부터 배척 당하고 멸시받는 유색인종의 암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은 책들이, 백인들이나 백인들 대부분으로 이루어진 서양 단체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니.

우린 매일 우리가 겪고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다. 거의 눈치채지 못하지만, 당신이 아시아인이라면 매일 차별 당하거나 혐오 받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여성이라면 익숙한 단어와 눈짓들로 차별 당하고 혐오 받고 있다. 당신이 아시아인 여성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괴롭힘이 괴롭힘인 줄 모른 채 당하며 '늘 그러니까',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라며 익숙해지는 것. 대부분의 정신적 폭력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피곤한 나는 칠이 벗겨진 손톱으로 책장을 넘겼다. 아시아인, 이민자, 여성에게 수치심과 불안이 숙명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건 언제인가 생각하면 두 눈이 아득해진다. 너무 멀다. 멀고 깊다. 우린 필요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한다. 사소하지 않은 것의 사소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수고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유색인종은 거리로 나섰고 어떤 여성은 글을 썼다. 또 어떤 유색인종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향한 단상 위에 섰고 어떤 여성은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자신의 목소리에 세상이 귀 기울이게 했다. 차별과 혐오의 역사가 유구했던 만큼 이를 바꾸는 것 또한 역사처럼 멀고 험할 것이다. 우린 우리가 야기하지 않은 이 수고에서 벗어나려 기어나가기 시작했고, 끝내 달리고 말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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