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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Sep 24. 2022

썩지 않는 시간이 고이는 모퉁이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⑦ 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여행을 떠나다.'


요새는 반대로, 여행이 우리를 떠났다고 하더라. 여행은 먼 곳으로 가는 일이라지만, 여행이라는 게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다.

한때는 여행 에세이 작가가 꿈이었다. 그 한때가 길기는 했다. 글의 기초 공사 재료는 '공감'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공감이 있다면 어떻게든 글은 지어지고, 그게 없는 글은 늘상 무너질 위험을 안은 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여행 작가가 꿈이었던 때에는 공감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게 경험을 감정과 감성으로 공유할 수 있는 여행 에세이라고 여겼다.

이병률 작가는 (시인이지만 오늘은 에세이가 주제니 작가라 하겠다) 내 한때의 꿈을 따뜻하게 덥혔던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글이 그러했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내 옆에 있는 사람>, <바람이 분다>, <혼자가 혼자에게>. 이 책들 안에 담긴, 작가가 다녀온 여행지의 공기와 냄새로 내 막연한 로망은 제법 그럴싸한 소망이 되곤 했다.





나는 혼자있기를 잘 하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혼자하기도 곧잘한다.
고등학교 때 잘 따르던 문학 선생님과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혼자 있을 때 내가 나인 기분을 자주 느낀다는 말에 선생님은 벌써부터 고독할 줄도 아냐고 했었다. 헤아려보니 10년도 더 된 에피소드네.

벚꽃이 피는 것은 그 벚나무 가지에 누군가 얼굴을 기댄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내가 세상 모든 벚나무를 돌며, 당신을 떠올리느라 무거워진 얼굴을 기댄 적 있다면, 당신은 알까.

- 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중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고 애틋하게 여기는 것도, 상호하는 것보다 혼자하는 걸 잘한다. 쌍방 감정의 경험치가 대단하지 않아서일까. 미움이든 사랑이든 꼭 전해지지 않아도 마음에서 생겨나면 온전해지는 것이라 여긴다. 대상에게 가닿아서 깨닫게 하지 않아도 그대로 완성. 이름을 부르는 일과 같이. 상대가 듣지 못해도 내 입술이 말했다면 그건 부르는 행위로 남고, 그의 이름은 불리운 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살아가는 건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일과 혼자서는 아무래도 버거운 일을 구분해나가는 일일 수도 있겠다. 웬만한 건 다 혼자서 해낼 수 있다 자신감이 넘쳤던 나는, 하나씩, 누군가와 같이 해도 나쁘지 않을 일들을 골라내고 있다.

구석을 공유하는 일이 그렇다. 시간이 고여도 썩지 않을, 마른 벽과 벽이 마주 서있는 곳. 그 어둡고 아늑한 모퉁이를 향한 채 꼭 붙어 앉아 서로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그 일에 적합한 대상과 적기를 찾으면 나는 이 책의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웠던 내 손끝의 촉감을 떠올릴 것이다.

혼자이며 함께인 내가, 철저히 혼자였던 나를 복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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