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프피 Sep 28. 2022

당신은 사랑하는 시인이 있습니까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⑧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스무 살부터, 누구도 지게 하지 않은 의무감으로 시집을 읽고 있다. 살며 읽은 적잖은 시집들은 보통 둘로 나뉜다. 제목만 그럴듯할 뿐 표제시조차 마음에 와닿지 못하는 껍데기들의 나열이거나(슬프게도 이 경우가 적지 않다) 몇십 편 중 감명을 준 단 1~2편의 시 덕분에 시인의 이름과 제목을 기억하고 있는 시집이다.
허수경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그 제목과 달리 내겐 후자로 남은 책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라는 시집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 문학을 즐기는 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또는 사랑해봤을 윤동주. 나는 그를 유달리 동경한다. 마치 윤동주에게 있어 별과 같이 말이다. 살면서 가장 닮고 싶은 이가 있다면 별을 노래하는 윤동주다.
그가 별을 노래한 것처럼 나는 동주를 노래해서일까. 자주 서정으로의 회귀를 소원하고 한다.

윤동주를 읽으며 그의 새로운 시를 읽을 수 없다는 것에 울적해지곤 했는데, 그때 나를 찾아온 게 허수경이었다. 물론 서정을 찾느라 허수경을 읽는다 하면, 시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허수경은 나의 새로운 서정이 되었다. 올곧고 단단한 몸 안에 물렁한 것들이 유유히 흐르는 외강내유의 서정.




산 덮고 그 산, 잎그늘 아래 축축한 땅의 수줍은 곳 열어 버섯 돋아오르면 그때 또 할머니가 지어주는 버섯밥 먹자, 좋겠네, 저 잎 여릴 때 만나 무성하게 산 그늘 될 때까지 붙어 있다가 그래 그래 할머니 머리에 꽂힌 저 붉은 꽃 좀 봐, 무슨 열대 섬 사는 아씨 같은 할머니 좀 봐, 그때까지 설거지 물에 담긴 양은 주발 새로운 시간처럼 씻으며, 그래 그래, 그 잎

허수경, <그래, 그래, 그 잎> 중에서



시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는데 순간의 감정을 간직하기 위함일 수 있고 추억의 노래일 수 있으며 인간성, 민족성, 자아의 표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불어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쌓이면 자연히 만들어지는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가 있다. 시인은, 시인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역사로 글의 영역을 넓혀간다. 이에 시인이 시를 쓰는 과정은 하나의 종, 하나의 민족 못지않게 중요하고 커다란 하나의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역사가가 기록하는 역사는 냉철해야 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이와 달리 시인이 기록하는 역사는 뜨거울 수도 차가울 수도 있으며, 날마다 계절마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한들거리며 움직일 수 있다. 말하자면, 과거가 이성과 기억의 영역에만 갇히지 않도록 감성과 추억의 영역을 만들어두는 게 역사적 측면의 시의 의미이자 시인의 역할인 것이다. 청동의 시간과 감자의 시간을 노래하면서 말이다.





허수경 시인은 하늘 또는 우주로의 편도 여행을 떠났다. 어쩌면 자신이 지은 시집 속 세계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돌아오는 티켓이 없는 여행이라는 것이다. 종종, 다른 차원에 가있는 그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소통하곤 하는데 그 매개는 새, 저녁, 기차, 꽃 등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서로 마주 보지 않고도 만날 수 있는 경지가 있고, 그것들은 시집의 어느 페이지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이전 07화 썩지 않는 시간이 고이는 모퉁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