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23차__Q. 수많은 이사 경험, 이사 에피소드 있으신가요?
어린 시절, 일이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삿날은 참 재밌는 날이었다. 짐을 다 뺀 집은 운동장처럼 넓어 보였고, 트럭 뒤 칸에 담긴 이삿짐은 컵에 담긴 팝콘처럼 보였다. 트럭의 조수석에 타는 일도 친구들에게 말할 만큼 신나는 경험이었다. 집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높아졌다가 낮아졌고, 나는 이삿날이 재미있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렇게 많은 이사를 했는데, 종용과 영숙이 이삿날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말투를 썼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물었다. 내가 재미있던 동안 무슨 마음으로 이사를 했냐고.
Q. 아빠, 이사 다닐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나 김종용과 황 여사의 결혼 생활은 진해 경화동에서 시작했다. 경화 초등학교 앞에서 셋방살이로 달세를 주며 살았다. 셋방의 주인아주머니는 아주 친절한 분이셨다. 주인아저씨는 진해 해군 부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시던 분이었는데, 우리 부부에게 너무나 잘해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가끔 통화를 하며 지내고 있다.
그 시절에는 난방을 연탄에 의존했다. 연탄을 태우면 연탄가스가 방구들로 들어와서 집 뒤로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당시에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인명 사고가 자주 났다. 그런 일이 뉴스에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그래서 방바닥에 금이 간다든지 구멍이 생기면 즉시 보수를 해야만 했다.
경화동 셋방살이 집에서 첫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아기가 갓난쟁이일 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내가 출근하고 없는 동안, 동기생의 부인이 아기를 보러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스 냄새가 솔솔 났고, 방으로 가스가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걸 발견해 밖으로 피했다고 한다. 그때 황 여사가 확인을 게을리했다면 지금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도 못 태어났겠지. 끔찍한 일이다.
주인집에서는 수리를 해준다고 했지만 바로 그날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이틀 후에 ‘이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진해에서는 이사를 많이 했는데, 첫 집이었던 경화동을 빼고는 모두 나와 황 여사의 싸움 때문에 집을 옮기게 됐다. 신혼생활이었다고 해서 싸움이 별로 없었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린 결혼한 지 한 달 후부터 싸우기 시작했다. 심각한 싸움은 아니라 잔잔한 싸움이었지만 갈수록 격화됐다.
1981년 12월부터 1985년 1월까지 총 7회에 걸쳐 이사를 했는데, 처음 이사할 때는 살림살이가 너무 단출해서 리어카로 하나 정도면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사 횟수가 더해질수록 살림살이도 늘어났다. 이사 횟수에 맞춰서 이삿짐 싸는 속도나 이사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황 여사는 가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을 갖추어 이삿짐 싸는 달인의 수준까지 도달했다.
진해, 포항을 거쳐 우리가 강화에 살 적에도 이사를 자주 했다. 강화읍 용정리 ‘럭키빌라’라는 곳에서 살다가 일이 벌어졌다. 빌라에 전세로 들어가 살았는데, 집주인이 빌라를 담보로 새마을금고에서 돈을 빌려 쓰고는 갚지를 못한 것이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 우리는 쫓기듯이 집을 떠나 잠시 아는 분 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됐다.
그때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밥을 묵고 유치원에 가야 하는데 책가방을 던지면서 가지 않겠다고 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지 않은 전셋집을 돌아다니며 살았어도 그런 부끄러운 감정이 없었는데, 남의 집에서 얼마나 불편했으면 내 자식이 저렇게까지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한 감정만 생겨나 그 집에 하루도 더 있고 싶지가 않았다.
이사란 신중히 처리해야 하건만, 우리 젊은 시절에는 이사가 어렵지 않아서 신중을 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지금에 와서 후회된다. 주민등록초본을 발급해보면 이사 흔적이 25회 정도 된다. 우리 시절, 아마도 서민이라면 다들 이 정도는 이사를 하지 않았을까?
나이 들고 몸도 늙어 내가 태어난 자리로 다시금 와 있는 지금. 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내 고향으로 왔지만, 내 자식들은 과연 고향이 어디일까? 난 태어나고 자란 자리가 그대로인데, 아니 명확한데, 내 자식들은 어디를 고향이라고 생각할까? 과연 찾을 수나 있을까? 지 애비 고향이라도 고향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이건 순전히 내 마음이겠지만 말이다.
이사. 나에겐 추억이 아닌 괴로움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은 이것 또한 추억이니, 생각해보자. 언제 또 이사 한번 해볼까나? ㅋㅋㅋ
이사는 잦았으나 지역을 벗어난 이사는 적었다. 나는 열아홉까지 강화에서 자랐고, 그 후로는 쭉 김포공항 인근에서 살았다. 종용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고향이 꼭 한 군데여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릴 적 추억이 배인 고향은 강화이고, 어른이 되어 추억을 쌓은 고향은 서울이다. 그리고 종용과 영숙이 있는 함평은 언제든 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이사 이야기가 고향 이야기로 막을 내리는 건 순전히 아버지로서의 궁금증을 표한 종용의 어떤 마음 덕분이었다.
☎ Behind
연탄가스 얘기를 엄마도 하고
아빠도 하시네요.
그럼 저 아기 때 두 번이나
연탄가스 문제가 생겼던 거예요?
그렇지.
그럼 둘 다 금방 이사하셨어요?
아니 첫 집에서는 삼일 뒤에 바로 이사를 갔고,
두 번째 집에서는 이사 안 가고 그냥 살았어.
수리했어요?
아니.
엥? 그럼요?
가만히 보니까,
가스 냄새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이사는 안 갔어.
가스인 줄 착각을 하셨다고요?
그럼 그때는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
가스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했으니까.
제가 일곱 살쯤에 강화에 살 때도
연탄가스로 난방을 했잖아요.
기억나요.
야, 인마. 그건 구조가 전혀 다르지.
구조가 달라요?
진해랑 포항 살 때, 니가 애기였을 적에는
연탄가스가 바로 구들장으로 들어가서
뜨뜻해지는 거였어.
가스가 방바닥을 덥히는 거였다고.
강화에서 살던 집에서는
먼저 플라스틱 통에 물을 가득 채우거든.
연탄을 때면 그 물이 데워지고
수도 배관을 따라 흐르면서
방바닥을 따뜻하게 해주는 구조였어.
그러니까 연탄가스로 문제 생길 일이
전혀 없었던 거지.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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