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처음이라는 말의 허상
우리는 종종 ‘처음’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 처음 마주한 눈빛, 처음 들은 목소리. 처음이란 말은 낯설지만 특별한 느낌을 남깁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순간을 ‘처음’이라 이름 붙이고, 그 시작을 인연의 출발점이라 믿곤 합니다.
그러나 과연 ‘처음’이란, 인연의 본질적인 시작점일까요? 혹은, 그저 우리가 인식하기 시작한 지점일 뿐일까요?
인연은 단지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을 넘어서,
어떤 흐름 안에서 연결되고 맺히는 삶의 결입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처럼, 우리의 일상 속을 조용히 지나갑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어느 순간 분명하게 ‘있다’고 느껴지는 무언가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처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연이란 정말 그때 막 생겨난 것일까요?
누군가와 처음 마주한 날이 인연의 시작일까요?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조용히 흐르다가, 내가 비로소 그것을 ‘깨달은’ 순간일까요?
우리는 ‘처음’이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덧씌운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처음’이란 감각의 선명함이지, 인연의 시작을 보장하는 실체는 아닙니다.
예컨대, 같은 공간을 여러 번 공유했지만 서로 존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번이나 같은 거리를 지나치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계절을 살아내면서도 그저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그러다 문득 어떤 날, 어떤 상황에서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처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처음’조차도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흐름의 일부였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연이란 단순히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되지 않은 채 흘러가던 무수한 가능성들 중 하나가, 어느 순간 의식 위로 떠오르며 존재를 드러낸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인연은 ‘있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또한, 우리는 종종 ‘강렬한 첫인상’을 인연의 징후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의 강도이지, 인연의 깊이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스며드는 관계, 익숙함이 아닌 낯섦으로부터 시작되어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관계야말로, 진짜 인연일 수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의 인상은 기억에 남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연결로 이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처음이라는 말에 속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준비되지 않은 인연은 나를 스쳐 지나가고, 준비가 된 순간에야 비로소 나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그것을 ‘처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 곁을 맴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눈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이란 단어는 인연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각의 경계일 뿐이며, 실체적인 경계는 아닙니다.
인연은 때로 아주 먼 시간과 거리를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인연은 헤어졌다고 생각한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이란 단어는 인연의 본질을 가리기보다는, 인연의 일부를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수없이 많은 관계를 경험합니다. 그중 어떤 관계는 처음부터 명확하고 분명하게 인식됩니다.
반면, 어떤 관계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의미를 갖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생각나고, 그제야 그 사람과의 인연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를 다시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과거가 새롭게 해석되는 순간, 인연도 새롭게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처럼 인연은 시간에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순서와, 인연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시간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인연은 그 사람과의 시간보다, 내가 얼마나 그 인연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에 더 민감합니다.
그래서 어떤 인연은 너무 이르고, 어떤 인연은
너무 늦게 다가오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모두 제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처음’이라는 말의 허상을 걷어낸다면, 우리는 인연을 훨씬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만남의 순간뿐 아니라, 그 이전의 모든 가능성과 흐름, 그리고 이후의 관계까지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작용입니다.
인연은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때론 우리 의식 바깥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연을 경계 짓는 방식이 아니라, 열어두는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이라는 말로 인연을 단정 짓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도 인연이 우리 삶 속에서 조용히 드러나는 과정일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인연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