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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연_1 03화

인연은 시작되는가, 발견되는가

03 인연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by 현루



인연이란, 내가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더 가까운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인연을 ‘우연한 만남’으로 인식하지만, 그 우연이 마치 정해진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내가 비로소 거기에 도착했을 때 관계가 시작되는 듯한 감각. 이것은 인연을 일방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떤 흐름 속에서의 ‘조우’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사의 반복이라면, 그것은 인연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인연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에는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바로, 깊이 있는 감응입니다.


그리고 그 감응은 때로, 나의 준비가 늦었기 때문에 더 오래 기다려야 했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인연을 '만든다'기보다는, 내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변화했을 때 그 인연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연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수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가능성이 나에게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나의 의식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만남도 낯설기만 합니다.


마치 눈앞에 문이 있어도, 아직 문을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때처럼. 그 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 그 존재를 보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연을 바라보면, 관계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내적 성숙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왜 지금 이 사람이 내 인생에 등장했을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 물음 속에는 놀라움과 궁금함이 섞여 있지만,

그 이면에는 중요한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내가 준비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 인연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사람은 이전에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 변화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배경처럼 스쳐갔을 겁니다.

그래서 인연은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사실은 나의 준비가 불러낸 감응입니다.

어쩌면 인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걸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내면이 성장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타이밍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늦게 어떤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그때 왜 몰랐을까”,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런 후회 속에는 인연을 인식하는 데에는 언제나 시간의 간극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인연은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치 물속에 잠긴 돌처럼, 시간이 지나야 그 무게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무게를 감지하는 순간, 우리는 그동안 그것이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인연의 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의 시선이 그것을 지나쳤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의 핵심입니다.

인연은 나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열린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인연을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연은 감정의 교환이기 전에, 존재의 개방입니다.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다가와도 그 누구도 인연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마음을 연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 속에서도 어떤 연결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차이라기보다는, 존재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감각입니다.

인연은 그런 태도를 향해 조용히 다가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태도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인연이 되어주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이미 존재하는 인연을 비로소 ‘보게’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연은 애써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준비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의 끝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아, 이 인연은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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