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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연_1 02화

인연은 시작되는가, 발견되는가

02. 익숙한 타인, 낯선 친밀감

by 현루

인연이라는 말은 때때로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아주 오랜 시간 곁에 있어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본 순간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어색함보다 편안함이 먼저 떠오르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인연은 시간의 길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깊이로 구성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관계를 ‘알고 지낸 시간’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년을 함께 지냈는지, 얼마나 자주 연락했는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를 인연의 깊이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람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끼고, 오랜 친구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인연은 단순한 경험의 누적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감응으로 이해됩니다.

즉, 어떤 존재는 나의 내면과 미묘하게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가치관이나 성격의 유사함 같은 명확한 기준이 아닙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인 교감, 또는 설명하려 들수록 미끄러지는 정서적 직관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익숙함과 친밀감은 꼭 과거의 공유된 기억에서 비롯되지는 않습니다.

익숙함은 과거로부터 왔다기보다는, 내 현재의 인식 구조가 그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합니다.

마치 오래된 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상하리만치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처럼, 우리는 어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고, 그 능력이 인연의 감각을 선행적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익숙한 타인’ 이란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낯설지만 내면에서는 어딘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그는 타인이지만 낯설지 않으며, 과거를 공유하지 않았지만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과 마주할 때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마치 설명할 수 없는 인력처럼, 어떤 끌림이 느껴지고,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자 동시에 결과처럼 여겨집니다.


반면, ‘낯선 친밀감’


이라는 말은 겉보기에는 가까운 듯 보이나, 실상은 내면적으로 거리를 느끼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길지만, 그가 누구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느낌. 서로의 일상을 알고, 대화를 나누고, 수많은 추억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 다가갈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느껴질 때 우리는 친밀하지만 낯선 기분을 경험합니다.

이 둘은 방향이 정반대이지만, 결국 인연이란 단어가 시간이나 정보의 양이 아닌, 내면의 울림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같은 결을 가집니다. 인연은 나의 어떤 부분이 타인의 어떤 결과 마주쳐 울림을 만들어낼 때 발생합니다.

그 울림은 꼭 크고 극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고요하고 조용한 감정으로도 충분히 느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각을 믿을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앞에서 종종 망설입니다. 이유가 있어야 행동하고, 타당성이 있어야 관계를 맺는 시대 속에서 ‘익숙한 느낌’이나 ‘낯선 거리감’ 같은 비논리적인 요소는 가볍게 여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언제나 이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감정, 그것이야말로 인연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이 조용히 접촉하는 감각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 접촉은 늘 말로 설명되지 않고, 때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분명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특별하지 않았더라도, 그 여운이 오래 남을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수없이 많은 말을 나눴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관계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연의 방식입니다.

표면적인 사건이 아니라, 내면에 남은 울림의 깊이가 그것을 결정합니다.

그렇기에, 인연은 늘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익숙한 타인을 놓치기도 하고, 낯선 친밀감 속에 갇혀 진짜 인연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관계가 나에게 어떤 감각을 남기는지를 더 진지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느낄 수 있는 관계가 진짜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의 외부에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이 어떤 방식으로 그 존재를 인식하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구조일지도 모릅니다.

타인은 언제나 타인입니다.

그러나 그 타인이 내 안에서 어떤 울림을 남긴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타인이 아닙니다.

그는 익숙한 타인이며, 낯선 친밀감을 품은 존재이며, 곧 인연이라 불리는 이름으로 기억될 누군가 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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