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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 리뷰

by 현루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면서 나는 여러 번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저 감상용 드라마라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은중과 상연의 관계가 내 삶 속 인연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의 오랜 우정과 갈등,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죽음 앞의 화해는, 단순히 드라마의 극적 장치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맞닥뜨릴 수 있는 삶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특히 나는 뇌졸중으로 인해 중도장애인이 된 후, 관계의 무게와 의미를 이전보다 훨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건강할 때는 친구 관계든 가족 관계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장애를 얻고 나니, 그 모든 관계가 얼마나 섬세하게 흔들리고, 또 얼마나 간신히 버티며 이어지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런 내게 〈은중과 상연〉은 단순한 우정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인생에서 인연은 어떻게 흘러왔고 지금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1. 오래된 친구, 오래된 감정


드라마 속 은중과 상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로를 알고 지낸다.

누구에게나 학창 시절의 친구는 있다.

그때의 친구는 단순히 함께 놀고 공부했던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꿈과 열등감, 성취와 좌절까지 나누는 사람이다.

드라마는 바로 그 지점을 깊숙이 파고든다.

나는 드라마를 보며 나의 ‘옛 친구들’을 떠올렸다.


뇌졸중 이전, 청년 때 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여행을 떠나던 벗들.

병을 앓은 뒤, 몇몇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지만 또 몇몇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은중과 상연이 서로를 향해 질투하고, 상처 주고, 그럼에도 끝내 끊어내지 못하는 그 복잡한 감정의 흐름이, 나와 옛 친구들과의 관계와 겹쳐져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다.

건강할 때는 몰랐다.

‘우정’이라는 건 늘 변하지 않고, 나이 들어서도 언제든 차 한잔 하며 웃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장애가 생기고 나니 우정의 모양도 달라졌다.

누군가는 나를 여전히 예전처럼 대하려 했지만, 누군가는 내가 짐이 될까 두려워 거리를 두었다.

나는 그 거리감을 탓할 수 없었다.

은중과 상연 사이에 오해와 질투가 끼어들듯, 우리 사이에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끼어든 것뿐이었다.



2. 죽음을 앞둔 친구의 부탁



상연이 은중에게 “내 마지막 여정을 함께해 달라”는 장면은, 나를 오래 붙잡았다.

그것은 단순히 극적인 설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 언젠가 겪을 수 있는 순간이다.

나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에서 만난 환자들을 기억한다.

어떤 이는 가족에게조차 의지하지 못한 채 요양보호사 손에만 기대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가족이 병실을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상연이 은중에게 동행을 부탁하는 장면은 단순히 ‘죽음 앞의 친구’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에 누가 내 곁에 있어줄까’라는, 누구나 가슴 깊이 품고 있는 질문이었다.

중도장애인이 된 내 삶에서도 이 질문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몸이 불편해지면 인간관계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손을 내밀고, 누군가는 등을 돌린다.


그래서 상연의 부탁은 내게도 낯설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 마지막을 앞둔다면,

나는 은중 같은 친구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3. 통증, 경련, 그리고 삶의 태도




드라마 속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파도는, 내게는 육체적 고통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매일 좌측 편마비에서 오는 통증과 경련을 안고 산다.

다리가 갑자기 굳어져 버리고, 밤마다 찌르는 듯한 통증에 잠을 설친다.

의사에게 ‘죽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절규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고통은 조금씩 달라졌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드라마 속 은중과 상연이 수십 년에 걸쳐 서로를 다르게 바라보듯, 나도 내 통증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망과 분노였지만, 이제는 그 고통이 내 삶의 리듬처럼 되어버렸다.

그것은 나를 끊임없이 깨우고, 삶을 붙잡게 만든다.

〈은중과 상연〉은 그런 내 태도를 되돌아보게 했다. 상연이 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인연을 붙들려했듯, 나 역시 고통 속에서도 삶을 붙들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싶다는,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다.



4. 인연을 붙잡는 힘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힘은, 단순한 우정담을 넘어서 인연의 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은중과 상연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상연은 은중을 질투했고, 은중은 상연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그 모든 것이 결국 ‘우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묶인다.

나 역시 장애 이후, 많은 인연이 떠나갔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매일 나를 도와주는 요양사,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친구,

혹은 브런치스토리에서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

그 인연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버틴다.

〈은중과 상연〉은 내게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인연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상처투성이여도, 질투와 오해가 뒤섞여 있어도, 끝내 함께 남아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5. 내가 얻은 결론



〈은중과 상연〉을 다 보고 난 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삶과 너무 닮아 있어서였다.


장애인이 된 후, 나는 종종 세상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내게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인생은 끝내 ‘인연’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나는 매일 통증과 경련을 견디며 살아가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글을 쓰고,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소소한 인연을 이어 간다.


은중과 상연의 이야기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삶은 고통과 질투, 상처로 얼룩져도, 끝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건 서로의 존재다.



맺으며



〈은중과 상연〉은 단순히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룬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긴 파노라마 속에서 인연이 어떻게 상처를 주고 또 치유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중도장애인인 나에게 이 드라마는 유난히 아프게 다가왔지만, 동시에 가장 따뜻한 위로를 주었다.

통증과 경련 속에서도 삶의 태도를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나에게, 은중과 상연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끝내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우리가 서로에게 남아 있는

기억과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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