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회복지사. 상담사
작가소개
캐나다이민 20년,
늦은 학업과 사회복지사의 길 위에서 이민자의 삶을 씁니다.
리뷰를 쓰게 된 동기
브런치에서 글을 쓰다 보면 가끔 글보다 더 깊은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마음은 대개 조용히 지나가지만, 어떤 분의 마음은 오래 머물러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민자의 부엌 작가님이 제게는 그런 분입니다.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면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신의 글을 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작가들의 글을 천천히 읽고 그 안의 마음을 발견해 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만 남의 글을 정독하고 마음을 담아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댓글은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시간이 들어가고 마음이 들어가고 존중이 들어갑니다.
그래서일까요. 작가님의 댓글을 보면 그저 지나가는 인사가 아니라 정성스럽게 읽고 남긴 흔적이라는 것이 단번에 느껴집니다.
저 역시 작가님의 글을 자주 읽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매번 댓글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읽고 나서 마음속으로는 “참 좋다.” “이 문장은 참 깊다.” “이 생각은 오래 남겠다.”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지만 그 마음을 글로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남의 글에 댓글을 다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히 부족한 말이 될까 망설여지고 작가님의 글이 워낙 좋아 어떤 말을 남겨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마음속에만 담아두곤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댓글 대신 이 글을 남겨봅니다.
이 글은 작가님께 드리는 작은 감사의 인사이자
한 편의 글을 정독하며 느낀 마음을 조심스럽게 풀어보는 기록입니다.
작가님의 글은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삶의 온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거창한 문장이 아니어도 삶의 냄새가 나는 문장은
사람을 오래 붙잡습니다.
작가님의 글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마치 오래 끓인 국물처럼 담백하지만 깊은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나면 무언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조용히 따뜻해집니다.
저는 그런 글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크게 흔들지는 않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글.
작가님의 글이 제게는 그런 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작가들의 글을 찾아 읽고
그 마음을 존중하며 댓글을 남겨주시는 모습은
이 공간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브런치라는 공간이 지금처럼 오래 이어질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분들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민자가 도달한 내면의 영토:
나이 듦의 온도가 증명한 자아의 복원력
1. 서론: 미뤄둔 삶의 부채를 상환하는 시간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과 ‘유예’의 반복이다. 특히 한 개인의 삶이 국가의 경계를 넘고 언어의 장벽을 마주할 때, 그 유예의 대상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된다.
<나이 듦의 온도 시리즈 10中 8번째 : 오늘, 나를 위한 시간>은 토론토의 매서운 겨울 공기 속에서 피어오른 어느 이민자 작가의 온기 있는 성찰록이다.
이 텍스트는 표면적으로는 나이 듦에 따른 평온을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낯선 땅에서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했던 한 인간의 치열한 생존 서사와, 마침내 도달한 존재론적 자유가 서려 있다.
작가는 "나는 오랫동안 나를 미뤄 두고 살았다"는 고백으로 포문을 연다.
이 문장은 이 시대의 모든 어른이 짊어지고 있는 공통의 부채감을 건드린다.
우리는 누군가의 부모로, 누군가의 자식으로, 혹은 사회적 톱니바퀴의 일부로 기능하기 위해 '나'라는 본질을 늘 가장 마지막 순서에 배치하곤 한다. 작가에게 캐나다로의 이민은 그 유예의 시간을 더욱 길고 고단하게 만든 외적 환경이었다.
2. 이민의 사회학: '낯선 소음' 속에서 지워진 이름들
이민자의 삶은 근본적으로 '이중의 소외'를 경험한다.
모국어의 세계로부터 단절된 채, 낯선 언어의 소음 속에서 새로운 좌표를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낯선 언어의 소음 속에서 하루의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소음'은 단순히 소리의 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해석되지 못하는 불완전한 소통의 공간을 뜻한다.
그 공간 안에서 작가는 가족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한국 사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희생적 어른'의 표상이 이국땅에서 더욱 공고해진 셈이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먼저 쓰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었다"라는 대목은, 개인의 욕망보다 공동체의 유지가 우선시 되었던 세대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비극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삶의 순서'라고 정의하며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러한 수용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작가에게 강인한 내성을 길러주었다.
가족의 필요와 주변의 기대를 채우느라 뒤로 밀려났던 자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치 겨울잠을 자는 나무처럼 내면에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작가는 '행위(Doing)'하는 존재로서 완벽했으나, '존재(Being)'하는 주체로서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3. 마흔아홉의 도서관: 지천명(知天命)을 거스르는 배움의 전율
에세이의 가장 강렬한 상징은 '마흔아홉의 입학'이다.
대개 이 나이는 안정을 추구하고 삶의 정리를 고민하는 시기다.
그러나 작가는 자녀들이 독립할 즈음, 다시금 배움의 전장으로 뛰어든다.
이는 단순히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수단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미뤄두었던 세월에 대한 보상이자, 이민자로서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실존적 결단이었다.
겨울밤, 자녀 세대와 나란히 앉아 책장을 넘기던 도서관의 풍경은 이 글의 문학적 정점이다.
창밖의 눈과 희미한 캠퍼스의 불빛은 차가운 외부 세계를 상징하지만, 그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작가의 내면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 인생의 시간도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길 위에 서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통찰은 '직선적 시간관'을 '순환적 혹은 다층적 시간관'으로 전복시킨다.
나이 듦을 종착역을 향해가는 퇴보의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로 세상을 다시 읽어내는 확장된 성장기로 재정의한 것이다.
낯선 언어로 문장을 읽고 새로운 생각을 배우는 행위는, 굳어있던 자아의 신경세포를 깨우는 일종의 '정신적 재탄생'이었다.
4. 일상의 현상학: 커피포트와 빨간 새가 가르쳐준 현존(Presence)
공부를 마친 뒤, 작가는 이제 '행위'에서 벗어나 '관조'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이 대목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고요'와 맞닿아 있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부엌에서 커피포트의 물 끓는 소리를 듣는 행위는, 흩어져 있던 의식을 현재 이 순간으로 불러 모으는 의식(Ritual)이다.
작가가 관찰하는 '이름 모를 빨간 새 한 마리'는 타국에서 홀로 숨을 고르는 작가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
눈 쌓인 겨울나무 위에 잠시 머물다 날아가는 새의 궤적을 바라보며, 작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밀도 높은 대화다.
"들숨만큼 내 마음에는 여유가 생기고, 잠시 잊고 있던 중심이 돌아온다"는 고백은, 명상을 통해 자아의 비등점을 낮추고 적정한 온도를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산책 중에 불현듯 찾아오는 "지금 이 순간이 나를 살리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은, 생존(Survival)의 단계를 넘어 생활(Living)의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제 작가에게 행복은 거창한 성취나 사회적 명성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호흡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데 있다.
5. 조율의 철학: 이민자의 삶이 남긴 가장 단단한 유산
이 에세이에서 반복되는 '조율'이라는 단어는 이민자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작가는 한국적 자아와 캐나다적 환경 사이에서, 그리고 과거의 희생적 역할과 현재의 독립적 자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음을 맞추어 왔다.
조율은 피곤한 일이지만, 조율을 거친 악기만이 맑은 소리를 낸다.
작가는 이민자로서 겪었던 불안과 낯섦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안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긍정한다.
"나를 위한 시간이 있어야 내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는 말은, 이민이라는 극한의 환경이 선물한 지혜다.
누군가에게 맞추어 살아야 했던 시간이 길었기에,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 사는 시간의 귀중함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이제 작가에게 토론토의 겨울 햇살은 차가운 이국의 빛이 아니다.
창밖 바로 앞까지 와서 잠시 머무는 그 햇살은, 작가가 정성스럽게 끓인 차 한 잔의 온기와 닮아 있다.
외부 세계와 내면세계가 비로소 화해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은유다.
6. 나이 듦의 재구성: 식어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
에세이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나이 듦'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그것은 생물학적 쇠락이 아니라 "삶이 무엇으로 따뜻해지는지를 비로소 알아가는 시간"이다.
이는 젊음의 열기(Heat)와는 다른, 중년의 온도(Temperature)에 대한 이야기다.
젊음의 열기는 무언가를 태워야만 유지되지만, 나이 듦의 온도는 잘 달궈진 구들장처럼 은근하고 지속적이다.
작가는 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위한 시간'이라는 땔감을 스스로에게 제공한다. 예전에는 이기적이라고 느꼈던 그 행위가 사실은 주변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근원임을 깨달은 것이다.
스스로가 단단하고 부드러워질 때, 비로소 타인에게도 진정한 온기를 전할 수 있다는 역설적 진리가 이 짧은 글 속에 녹아 있다.
작가는 독자에게도 그 온도를 발견하기를 권유하며 글을 맺는다. 이는 작가 개인의 체험을 보편적인 인간의 지혜로 확장하려는 이타적 의지의 발현이다.
이 성찰의 끝에서 우리는 한 작가가 이룩한 내면의 영토를 보게 된다. 그곳은 더 이상 망명지의 낯선 땅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침묵으로 일궈낸 가장 아늑한 안식처다.
작가는 '이민'이라는 특수한 삶의 양식을 통해 '나이 듦'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이 글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정직함'에 있다. 자신의 미뤄둔 시간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늦깎이 대학생의 서툰 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일상의 사소한 풍경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하는 태도는 독자들에게 깊은 위로를 건넨다.
이 에세이는 자전적 서사가 지녀야 할 성찰의 깊이와 문학적 은유의 적절한 배합을 모두 갖추고 있다.
토론토의 겨울 공기를 빌려와 역설적으로 삶의 온기를 증명해 낸 작가는 이제 우리에게 질문을 건넨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미뤄두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떤 온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작가가 끓여낸 그 차 한 잔의 온기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각자의 '나를 위한 시간'을 발굴해 내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작가의 말처럼, 나이 듦은 결코 식어가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명단의 가장 윗자리에 내 이름을 올려놓는 용기를 배우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