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Oct 12. 2021

12. 아직까지도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탄생시키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그래도 당신을 만나게 해 준 나라




​​

회상이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 현실에 대한 열정적인, 혹은 심드렁한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새로운 탄생이다.

스베틀라냐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본문 중


​​

*


여기까지 쓰고 보니 싱가포르에서의 사건들이 참 별일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보다 조금 어린 내가 겪은 미성숙한 시간들. 화가 풀리는데 오 개월이 걸렸다. 이 순간처럼 아, 다시 보면 별것도 아니었는데.라고 느끼기 전까지 그때의 앙금을 사골처럼 씹어가며 글을 썼다. 좁디좁은 속이지만 시작했으니 끝을 맺어야 한다. 지금에 와서야 한없이 조잡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때의 나에겐 세상이 무너지고 억장이 터지는 일이었으니까. 오 개월이 지나서야 무뎌질 만큼, 에휴 또 한걸음 어른에 가까워졌겠지 하고 안도할 만큼.

사장과 매니저와의 삼자대면도 무사히 넘긴 뒤, 나는 적당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은 일대로 설렁설렁 흘러가고, 쉬는 날엔 싱가포르에 이름 있는 바들을 돌아다니며 얼굴 도장을 찍었다. 계약이 끝나고 이 이상한 가게에서 나가고 나서도 나는 싱가포르에 있고 싶었다. 바텐더로서, 식음업계 종사자로서 배울 것이 많은 나라였다.(이 무렵 사랑에 홀랑 빠져 언니의 곁을 떠나기 싫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비극은 의외로 쉽게 찾아온다. 사흘, 혹은 나흘 만에 가게 문을 닫으라는 정부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작년에 코로나를 호되게 겪었다. 확진자가 만 명 가까이 치솟고, 백화점과 음식점은 물론 도시 전체에 봉쇄령이 내렸다. 락다운은 삼 개월 가까이 지속되었다. 대기업이 아닌 소규모 사업체들은 아둥바둥 이를 악물고 버티거나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해야 했다. 올해는 준비를 단단히 한 건지 확진자가 스무 명이 넘어갈 때부터 영업시간을 단축하고 옆 테이블과의 거리에 제한이 붙었다. 병원과 공항, 학교에서 차례로 확진이 이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터는 불안해졌고 거리는 뒤숭숭했다. 정말 봉쇄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건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들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였다.

봉쇄령은 삼일의 말미를 두고 내려졌다. 확진자가 마흔 명을 넘어갈 때였다. 모든 식음업장은 실내 영업을 금지하고, 배달이나 포장만 가능하다는 지령이었다. 아예 가게의 문을 닫던가 몇 안 되는 한식 안주를 포장/배달해야 하는 상황. 나는 얼마든지 시키는 대로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출근을 해도 좋고, 무급으로 쉬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삼일이라는 시간은 대책 없는 사장들이 대책을 마련하기에 짧아도 너무 짧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눈치껏 하루에 한 번 물어보는 것으로 그쳤다.

락다운 기간 동안 운영이나 영업에 대해 정해진 부분이 있는지, 나의 역할은 어떻게 되는지, 계약서 상에 언급되었던 급여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지.

첫날엔 배달로 돌릴 테니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근무하라는 말을 들었다.

둘째 날엔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셋째 날엔 상의해보고 알려줄 것이니 휴일을 보낸 후에 네 시까지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

근로자의 입장에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봉쇄령은 내려졌고, 가게는 배달을 하거나 포장을 할만한 메뉴가 없고, 내 역할과 근무여건에 대한 어떤 마음의 준비조차 할 수 없으며 급여도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사장이 나를 부른 시간은 봉쇄령이 내려지고 다음날이었다. 달의 반토막이 덜렁 날아간 시간. 초조하고 짜증스러웠지만 사장들도 고작 삼일 만에 가게가 냅다 문을 닫게 되었으니 머리가 복잡하리라 하고 가시방석으로라도 일단 대기했다.


아마 이쯤이 내가 견딜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아니었을까. 봉쇄령이 내려지고 난 후의 삼일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틀을 더 기다린 나는 굉장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먼 타국에서 돈을 받고(불만족스러운 곳에서) 일해야 하는 나와, 작년 봉쇄령이 내려진 삼 개월 동안 생판 무급으로 지냈다던 직장 동료의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나는 약속한 시간에 칼 같이 찾아갔다.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한 업장에 혼자 들어가서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가게를 영업한다면 평소대로의 오픈을 하면 될 테지만 정상 운영을 할지 안 할지도 들은 게 없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은 내가 준비해야 할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야기만을 듣기 위해 온 나는 멍하니 앉은 채로 손톱을 뜯었다. 십 분이 지나고, 십 오분이 지나고, 사십 분이 지났다.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매장에 하나 있는 직원인 데다가 한국에서 부러 데리고 온 인력에 보여주는 성의가 단 한 톨도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약속시간에 맞춰 얘기를 들으러 왔는데 그날 조차 일언반구도 없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늦는다니? 아마 나는 이때부터 고삐가 풀렸던 것 같다. 머릿속은 욕지기로 엉망이었다. 이 사람들의 상식을 따라가 보려고 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미 땅땅하게 당겨져 있던 고무줄이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머리에서 위험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회상일까.


이때의 기억은 다시 떠올려봐도 열불밖에 터지지 않는다. 이 날것의 글을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심지어 기억을 더듬다 지쳐 중간에 멈춰버렸다. 이 이상한 곳을 적어놓으로 했던 이유는 글로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홧병이 나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주 작정을 시작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슬쩍만 들여다보려고 해도 피곤하고 기력이 빠진다. 싱가포르의 불건전한 가게나, 11일 연근을 시키는 의욕 없는 지금의 업장과 다를게 뭔가 싶다. 세상 여기저기도 화가 나는 일 투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역꾸역 이 글을 적어가는 이유는, 이 이상하고 거지 같은 곳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눈부신 천국이 잠깐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쓴다. 이 모든 일들을 지나쳐 언니를 만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그런 엔딩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면 이런 쓰레기 같은 경험도 얼마든지 다시 헤집어볼 수 있다. 기꺼이, 아주 기꺼이.



오늘 언니에게 문자가 왔다.

그녀가 다음 주에 한국에 온다는 소식이다.

언니가 오기 전에 구린내 나는 이야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황홀함과 탄성 가득한 기억들로 채우고 싶다. 그걸 위한 회상이다. 내가 탄생시키고 싶은 것은 언니와 함께 보냈던 이틀 밤이고, 그전에 발에 걸리는 것은 그저 심드렁한 서술일 뿐이다.



내일 마저 써야 하는 심드렁하고 다시 화가 나는 서술일 뿐이다.




​​​


https://brunch.co.kr/@kimgood9495/64 ​


매거진의 이전글 11. 당신을 도저히 싫어할 수 없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