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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10. 2021

그가 없어 그만큼 누추해질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단상 1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

첫 번째 에세이 '교수형' 중

​​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 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 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


*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동생의 올해 목표는 친할머니의 인생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동생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쓴 글에서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로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조금만 더 일찍,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많은 것을 궁금해했더라면. 내가 아는 한 범접할 수 없는 선함을 가지고 있었던 그분은 나도 아빠도 부인도 모를 세상을 어떻게 살다 가셨을까.

시간은 유한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숨 쉬고 말할 수 있을 때는 돌아오지 않을 어떤 순간이다. 나는 그것을 자주 잊지만 동생은 결코 잊지 않는다. 그 애는 지나가는 시간이 애가 타 발을 동동 구른다.

사람의 목숨은 이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궁금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여운과 그리움을 남기는.

죽음이 오락처럼 느껴지게 하는 요즘의 영화들을 생각한다. 인간이 시든 나뭇잎처럼 부질없어 보이게 하는 지난 전쟁들의 흔적을 생각한다. 삶과 죽음이란 손바닥의 위와 아래처럼 쉽게도 뒤집히는 것일지 모른다. 지금도 숨을 쉬고 피를 뿜어내고 있을 내 심장이, 아직 부서지지 않은 뼈와 근육들이 언제까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죽은 이가 보고 싶다. 죽어서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사무치게 보고 싶다. 스크린과 종이책 안에서의 수많은 죽음들을 몰려오게 하는 문장이었다.

밧줄이 목에 감기기 전까지 계속 자라나고 있었을 남자의 손톱과, 그가 없어 그만큼 누추해질 세상.

인간으로서 사형대에 오르는 다른 인간을 지켜보았던 조지 오웰의 문장이 폐부 안쪽을 지그시 누른다. 한 사람의 죽음에, 우리는 모두 슬퍼해야 한 한다고.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서질 그런 정도로 아팠다.

이내 어떤 정신도 발아하지 않았다.

                                                           -이상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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