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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16. 2021

영혼만이라도 저 멀리로

폴 서루 <여행자의 책>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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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루, <여행자의 > ​​



최상의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다. 보고 조사하고 평가하기 위해 여행자는 홀로여야 하고  홀가분해야 한다. 여행자에게 타인은 방해가   있다. 타인은 자신의 두서없는 인상들을 여행자에게 밀어 넣기 때문이다. 말동무가  만한 사람들은 여행자의 견해에 방해가  것이다. 반면에 지루한 사람들은 “이것 , 비가 내리네또는 “여기 나무가 굉장히 많은데같은 허튼소리로 침묵을 망치고 주의를 흩뜨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사물을 분명히 보고 똑바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소 진부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비추어 특별하고 흥미로운 비전을 포착하기 위한 고독의 투명함이다.

_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


*


애인이 있을 때는 애인과 함께 여행을 갔다.

동생과 둘이서도 여행을 가곤 했다.

드물지만 몇 번은 친구와도 여행을 했다.​

하지만  나를 사색하게 만드는 것은 혼자 하는 여행이다.

2016년의 스리랑카, 2018년의 하와이, 2019년의 도쿄, 하와이, 독일 전부 혼자서 준비하고 출국했던 여행이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일행이 없을 때 둘러볼 곳이 많아진다. 똑같은 초침인데 하루가 48시간인 것처럼 여유롭다. 우연과 함께 찾아온 소중한 사람들과의 순간은 이 여행 이후로 내 인생이 더 다채로워질 거라는 확신이 들게 만든다. 혼자 하는 여행에는 불안과 두려움만큼 값진 것이 남는다. 다음 여행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연인과의 여행에, 가족과의 여행에, 친구와의 여행에서는 나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부를 수 없었다. 언제든 다음 코스를 생각하고 관광책자에 체크해둔 것들을 사진으로 남길 의욕에 만만해진다. 동행이 있을 때의 나는 관광객이었다. 원래 나의 생활을 뒤로 남겨 두고 온, 숨 가쁘고 역동적인 낯선 도시의 관광객.

혼자 온 여행길은 공항에서부터 다르다. 느긋하게 캐리어를 끌고 나와 거기에서부터 길을 찾는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조금 헤매고 오래 걸릴지언정 나는 내가 점찍어둔 숙소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공항의 공기를 들이켜고 유심을 바꿔 낀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들여다보며, 각 나라마다 다른 공항의 내부를 크게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한다. 여행의 시작이다.

옆을 보아도 마주칠 시선이 없으니 세상 모든 것이 눈 부셔 보인다. 전봇대, 가로등, 길가의 깃발. 구름, 하늘, 빛바랜 자동차.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전부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관광명소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을 마주치게 된다. 내가 살아오고 보아 온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 하는 여행은 사람에게 그런 여유를 준다. 세상은 너무 크고, 나는 너무나 작고,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려도 낯선 곳을 걷는 것만큼 신선한 환기는 없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하는 여유. 늘 보던 것과 위도와 경도가 다른 하늘이라는 것이 내 생각을 무성하게 만든다. 조그만 인간이라 보고 다닐 것이 많다. 남은 수명을 다 바쳐 떠돌아도 지구 어딘가엔 여전히 내 생각을 더 무성하게 만들 장소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은 지난 문학 및 에세이에서 여행에 대한 문장이나 격언들을 뽑아와 엮어 만든 책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울렁울렁 발바닥이 근지러워진다. 세상엔 여행이 취미에 맞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늘 어딘가로 떠날 생각만 하고 있는 인간이라 이 책이 유독 고난스럽다. 같은 풍경을 삼 개월째 보고 있는 이 시간이 아쉬워지게 만든다. 자꾸만 동방의 어느 나라로, 중국의 만리장성으로,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으로 내 마음을 날려 보낸다. 내가 지금껏 해온 여행들에서 행복한 기억들만 채로 걸러 꿀꺽꿀꺽 삼키고 있다.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고 싶다. 배낭 하나를 메고 가벼운 몸으로 동남아시아의 여섯 국가들을 휘젓고 다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을 때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맡은 일에서 도망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애써 죽이고 사는 욕망에 바람을 불어넣다니. 열심히 적셔놓은 불씨에 마르고 향긋한 장작을 집어넣다니!

당장 떠나고 싶은 밤이다. 이미 타국이면서  다른 곳으로 영혼만이라도 보내고 싶은 밤이다.​


이번 휴일에는 혼자서 싱가포르의 유명한 관광지라도 하나 점찍어 다녀와야겠다. 이 불씨를 죽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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