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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17. 2021

살아있는 것들 속에는

한승태 <인간의 조건> 단상


​​


한승태 <인간의 조건>

‘6. 퀴닝 Queening’ 중


민규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지 울기 시작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 싶었다. 그렇게 울고도 여전히 눈물이 나오는 게 놀라웠다. 누구 말마따나 인간의 머리통 안에 그렇게 많은 물이 들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결국 그 모든 상황이 민규를 서럽게 만들었다. 우리가 걸어야 했듯이 민규도 울어야만 했다.


*



살아있는 것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것을 품고 있기 때문에 경이롭다.

바닥에 깨진 골통을 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인간의 혈관 속에 그렇게나 많은 피가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고,

펑펑 울려보기 전까지는 인간이 스스로 그렇게 많은 수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어깨너머로 전해 들었던 수많은 죽음들이 모두 저마다 무거운 것들이었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을 가보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처럼.

나무를 베기 전까지는 그 속에 몇 겹의 나무테가 굽이치는지 가늠할 수 없다. 반토막난 허리를 눈 앞에서 보고 나서야 실감한다.

살아있는 생물이 이만큼이나 아파했노라, 슬퍼했노라, 길고도 짧은 생을 살며 흔적을 남겼노라고.

피나 눈물처럼 기쁨도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무언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웃음의 숫자를 셀 수 있다면. 환호성의 지를 때의 감정을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남이 흘리는 눈물에 내 심장도 발바닥까지 내려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의 긍정적인 감정에도 그만큼 직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누군가 우는 것이 싫다. 그것은 너무 가슴이 아픈 일이다. 갓난아기며 강아지 닭 할 것 없이 다른 생물들의 울음은 구슬프게만 들린다.

전염된 웃음은 그 순간 짧게 터지고 흐드러지는데 눈물이 떨어진 자욱은 오래 남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괜히 그 앞에서 타인의 비밀스러운 슬픔을 훔쳐본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에게도 조그만 방울 하나가 튀었다. ​


갓 태어나면 울어야 한다. 천장을 보고 있으면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어야 한다. 자연스레 걷고 뛰고 언어를 깨쳐야 한다. 태어나면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다 선행하고 나온 것처럼 착착 이루어진다. 그 사이 전전긍긍하는 것은 부모와 주변인의 몫이지만 제 기능을 하는 몸을 갖는 것은 아이의 일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울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웃게 될 일만큼 많을 것이다. 작가가 쓴 민규 씨의 울음에는 철이 없어 복장 터지는 구석이 있다. 그것도 직립 보행을 준비하고 기저귀를 떼는 것과 같은 수순일까. 높은 콧대를 꼬옥 눌러 밟히고 얼마만큼의 눈물이 나오나 확인하려는 것처럼 울어보는 것. 그만큼의 무너짐을 경험하는 것.​


걸어야 했듯이 울어야만 했다는 작가의 문장이 속을 울린다. 그러지 않을 수 없어서 울어버린 나날들에 우리는 언제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울만큼 힘들지만 울지 않을 거라고. 눈물 흘리며 쓸 기력을 아껴 다른데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아직 살아있다. 하루치 나이테를 늘려가며 아둥바둥 이승의 끝에서 책을 읽고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

남이 서럽게 울었다는데 내가 하는 말이라곤 하나같이 고약하지만 적어도 나 하나만큼은 많이 울 일 없이 살고 있다.


당분간 더 이렇게 살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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