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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19. 2021

영화 같은 사랑을 상상했다

앨리스 먼로 <거지소녀> 단상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

5장, ‘거지 소녀’ 중


로즈는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질 거라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 자기 안에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내, 애인, 하고 생각했다.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말들. 그 말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적이었다, 실수였다. 그것은 그녀가 꿈꿔온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


*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주는 애정이 사정없이 휘감겨, 똑같은 애정을 그에게 되돌려 주고야 마는 연인이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에 찬탄한다. 그것은 실재하며, 사람을 막무가내에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내가 받았던 수많은 사랑들을 생각한다.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나한테 과분한 것들이었는지. 마지막 연애는 아무리 마음을 퍼담아도 저울의 눈금이 미동도 없이 연인의 방향으로만 고개를 꺾고 있어 끝이 났다. 도무지 동등해지지 못할 만큼, 끝도 없는 애정을 받았다. 하루를 더 살아가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서 예전의 미숙했던 내가 어떻게 타인의 그렇게나 지순한 연심을 받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두 명의 사람, 나를 여왕처럼 공주처럼 천사처럼 요정처럼 대해줬던 그 사람들은 나를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 지금은 사랑에 눈곱만치의 미련도 없다. 교통사고처럼 내 삶을 치고 지나간다면 방패를 올릴 틈도 없이 쓰러져버리고야 말겠지만, 일단 지금은 돌부리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내가 받은 사랑은 너무나 완벽했던 나머지 타인과의 거리감이 지극히 편안한 현재의 상황에선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사랑을 모를 때에 영화 같은 사랑을 상상했다. 내가 좋아했던 영화는 주로 비극이었다.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 춘광사설의 보영과 아휘, 번지점프를 하다의 인우와 태희같은. 아마 소설 속의 로즈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어떤 언어로든 아름답고 애틋한 단어가 아닌가. 로맨스를 원하면서 내가 원하는 로맨스는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이라는 자조적인 생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는 게 아니라 살아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비단 이루어질 수 없는 전제인 그런 사랑. 그렇게 기대하면서 터무니없는 망상만 키워갔다.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해. 이 정도도 안 된다면 사랑을 해야 할 이유가 없지.’

그때의 나는 얼마나 건방졌던가.

나에게는 주인공 로즈와 달리 한없이 깨끗하고 불순물 없는 사랑이 왔다. 정말 불꽃같았던 첫 연애였다. 내가 비웃어왔던 모든 것들을 집어던지고 결혼을, 아이를, 미래를 생각했다. 스스로의 의지였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책 없이 사랑에 빠져들었다. 지금 누구의 아내도 애인도 될 생각이 없는 나로서는 아찔하면서도 풋풋했던 기억이다. 그렇구나. 그랬어. 그만큼 너를 정말 좋아했었지.

사랑은 사람을 한 사람으로 있을 수 없게 만든다. 팔이 세 개 달린 것처럼, 신발과 신발끈처럼, 횡격막과 딸꾹질처럼 몸 한구석에서 돋아나 온갖 시간을 함께 보낸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랑이 있으리라 생각도 하지만, 내 기준에서 거리가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교류 정도일까. 아무리 끌어안아도 한 몸이 되지 못해 아쉬운 것, 잡았던 손을 놓으려면 팔 한쪽이 우두득 뜯겨 나가는 것이 내가 아는 사랑이다. 영화 같은 사랑을 했다. 나는 그렇게 사랑받았다.

그래서 두 번다시 그 짓을 할 자신이 없다. 인생에 로맨스 영화를 두 편이나 찍었으니 이제는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다.

홀로 완전한,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 타인으로 인해 아쉬워하고 속상할 일 없는 성장 영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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