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나도 뿜어대기로 했다.

속이 눌어붙은 우리에게

by 김고양


밥통이 더 이상 김을 뿜지 않는다.

버튼을 누르고 30분이면 삐삐-삐 소리와 함께 김이 뿜어져 나와야 하는데, 웬일인지 더 이상 뿜지 않는다.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리는 여전히 울렸고, 밥은 완성되었으니. 어쩌면 배를 채워 넣는 게 가장 우선인 삶을 살고 있는데 밥통의 김 따위 생각할 겨를이 있을 리 없다. 비로소 이상함을 느낀 건 몇 번의 밥을 더 안쳤을 때다. 밥이 완성되었는데 김 뿜기 시간이 없다니. 수증기 배출구가 막힌 모양이다. 처음엔 반겼다. 매섭게 쏟아지는 김 덕에 벽지가 울 걱정은 던 셈이니까. 세 들어 사는 단칸방 인생은 명백히 을이다. 을로서 탈없이 살아가려면 과도하게 민감한 부분을 가져야 한다. 김을 뿜고 안 뿜고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여전히 배는 채울 수 있고, 벽지가 울 일은 없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나는 모난 사람인 게 분명했다. 불편하게 하는 것이 많았다. 대학 울타리 안에서도 종종 불편했는데, 울타리 밖을 경험하고 나니, 대학은 적어도 상식적이려 노력은 하는 곳임을 깨달았다. 억지로 친해져야 할 자리들도,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내는 시덥잖은 권위들도 역겨웠다. 모서리를 몇 번 드러냈더니 어느새 사람은 몇 남지 않았다. 언쟁도 미움도 힘에 겨워서 이제는 곧잘 숨기곤 한다. 역시 뿜지 않는 삶은 평화롭다.


액체가 기체가 되면 부피가 늘어난다.

물의 경우에는 1700배 정도 부피가 커진다고 한다. 온도라는 에너지를 공급해주어야만 액체는 기체가 되니 분자들은 기체일 때 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 건 당연하다. 이들이 점유하는 공간이 부피인데, 이때 공간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압력은 상승한다. 즉 밥통이 뜨거워지면 수증기는 더 활발하게 밥통 내부를 활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액체임이 분명하다.

어느새 내 안에 흘러들어왔는데, 감정이 뜨거워지니 그 부피가 너무나 커졌다. 사람 하나 담기에도 작고 모난 나의 그릇인데, 점점 커지기만 한 너는 나를 꽉 채웠다. 너의 말투, 손짓, 눈빛은 나를 더욱 달아오르게 했고 그럴수록 너는 내 안을 더욱 세차게 날아다녔다. 오롯이 견뎌내기에는 한계가 온 것만 같아 어떻게든 표현을 해야만 할까 고민을 하자니 네가 떠나갈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 꼭 뿜어내야만 사랑인 것은 아닐 것이다. 김을 뿜지 않아도 밥은 되니까, 말하지 않아도 이건 사랑일 테지.


어제는 밥통 청소를 했다.

밥을 푸려는데, 솥 가장자리에 물과 이름 모를 찌꺼기들이 잔뜩 고여있었다. 김과 함께 날아가야 할 것들일 게다. 청결에 둔감한 내가 보기에도 징그러웠다. 처음으로 밥통 청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몰랐었는데, 밥통 바닥엔 청소용 꼬챙이가 붙어있었다. 간단히 밥통 분해를 하고 가뭄철 갈라진 논바닥 같이 눌어붙은 것들을 꼬챙이로 긁어내었다. 청소를 마친 밥통은 우렁차게 김을 뿜어내었다. 벽지가 걱정이 되었지만 속이 눌어붙는 것보단 나을 일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나도 뿜어대기로 했다.

조용히만 살아야 하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분노도 사랑도 견디기에는 내 속은 눌어붙는다. 정을 맞는다는 게, 네가 나를 거절한다는 게 두려워 숨죽이지만은 않기로 했다. 나도 여기 있다고 우렁차게 김을 뿜어야겠다. 정도 거절도 슬프겠지만은 그리 잔혹하게만은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 건강하게 지은 사랑을 혹시 네가 맛봐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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