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에게 친절한 작가가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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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군더더기일까. 없어도 뜻 전달에 지장 없으면 군더더기다. 크게 셋이 있다. 첫째, 접속사(문장 부사); 둘째, 관형사와 부사; 셋째,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관형어나 부사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문장 성분이다.
없어도 좋은 접속사는 과감히 삭제해야 한다. 문장을 잇는 사이에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같은 접속사를 넣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문장과 문장이 자연스레 연결되면 접속사는 불필요하다. 부사와 관형사도 적게 쓸수록 좋다. 같은 글자를 반복한 흔적이 있다면 운율을 해치므로 문장을 고쳐야 한다. 화려함과 기교에 치우친 문장 성분도 걸러내는 것이 좋다.
인생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감정이 여럿 있는데, 허영심도 그중 하나다. 허영심은 아주 고약한 감정이다. 허영심에 빠진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며 의미 없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 글 쓰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허영심은 지식과 전문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되짚어보자.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많이 읽어라. 많이 써라. 혹평을 두려워하지 마라. 같은 내용이면 짧게 써라. 군더더기를 덜어라. 이것이 유시민이 말하는 글쓰기의 원칙들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한다. 아직 '영업기밀' 하나가 남아 있다.
소통의 비결
독자들은 내 글이 쉽다고 말한다. 예전에 썼던 신문 칼럼도 기자들 말로 열독률이 높았다. 오피니언 페이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중년 여성 독자들도 내 칼럼은 즐겨 읽는다고 했다. 쉽다고 해서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
나는 주제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텍스트를 쓴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유시민
아무리 좋은 내용도 어렵게 쓴다면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글로는 소통도 교감도 안 된다. 중년 여성 독자가 유시민이 쓰면 오피니언 페이지를 읽는다. 이건 마치, 로봇이나 공룡 장난감을 소개하는데 성인이 찾아보게 만드는 매력과 같다. 중년 남성이 화장품 분야를 열독한다고 하면 놀랍지 않은가. 성별 성향, 나이대 성향까지 극복하는 유시민의 글은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유시민이 싫어하는 글을 피하면 '쉬운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책은 싫다. 지나치게 길고 복잡한 문장도 싫고, 전문가라야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용어도 싫다. 따로 검색해야 알 수 있는 이름과 학설을 아무 설명 없이 나열한 글도 싫다. 글을 그렇게 쓰는 사람도 싫다.
전문용어, 본문 내용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름과 학설 등을 나열한 경우. 또는 그렇게 쓰는 부류 전부. 그는 싫어한다. 그는 말한다. 철저하게 독자를 존중하면서 써야 한다. 다른 정보 없이도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 웬만한 내공 아니면 어려울 것이다. 읽기 쉬운 글이라고 쓰기도 쉬운 것은 아니니까. 쉽게 쓰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다음은 인터넷서점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독자 서평 가운데 한 대목이다.
어려울 것을 알았지만 꼭 읽어내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가사일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을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기에 몇 번의 양해를 구하고 근처 카페에서 자리 잡고 몇 시간씩 (중략) 어떻게든 읽어낸 후에야 어떤 말이든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의지가 있었다. (중략) 그런데 책을 다 읽어도 내가 쓸 수 있는 말은 없다. (중략) 랑시에르, 시오랑, 니체, 낭시, 바티유, 블랑쇼… 내겐 새로운 언어마냥 어려운 이름이었지만 역시나 아름다운 이름이기도 했다. 옮길 수 없이 많은 밑줄과 메모들이 가득하고 나름의 이해를 품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놓을 능력이 못 된다.
이 서평을 읽으면서 나는 공분(公憤)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서평을 쓴 독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 다 읽었는데도 책에 관해 쓰지 못했다. 밑줄도 많이 쳤고, 책에 가득 메모했다. 하지만 막상 쓸 이야기가 없다. 이것이 독자의 잘못일까?. 그가 읽은 책은 시인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2014, 그린비)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 소개를 살펴보자.
다음은 출판사가 제공한 책 소개의 한 대목이다. (주 : 반절만 옮깁니다)
랑시에르의 사유를 기본적인 틀로 삼아 진은영은 철학과 문학의 다양한 레퍼런스를 호출하여 재구성한다. 각 장의 글들은 이러한 사유의 세밀한 기록이다. 칸트로부터 리오타르로 이어지는 '숭고의 미학'이 예술과 정치 모두를 윤리의 이름으로 박제해 버릴 위험성이 있음을 일깨우고, 부르디외의 계급적 구별 짓기가 품은 미학적 보수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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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편집자도 책을 독해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 글은 그저 읽을 수 있을 뿐, 머리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난해하다. 편집자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서평을 쓰는 사람이야 할 말이 있을까.
유시민은 이 책을 제대로 독해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있을까,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인 진은영은 시집을 여러 권 냈다. 난해하지 않은 시를 쓰는 시인이 이토록 난해한 산문을 쓰다니. 시를 쓴 진은영과 《문학의 아토포스》를 지은 진은영이 같은 사람인가, 그는 의아해한다.
다음은 《문학의 아토포스》 2장의 한 대목이다. (글쓴이 주 : 반절만 옮깁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미학적 전위와 정치적 전위가 중첩되는 과정에서 실패로 돌아간 미학적 전위운동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 실패가 미학과 정치가 만나서 필연적으로 미학의 자율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일까? 미학적 전위가 치안의 운동으로 전락하거나 그것에 포획된 것은 아닐까? 정치와의 만남 없이도 실패한 미학적 운동들, 또는 정치와의 만남이 없어서 실패한 미학적 운동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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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공부를 많이 한 철학자,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시인, 크게 주목받는 문예비평가의 글이다. 《문학의 아토포스》는 독창적이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소수의 연구자와 평론가만이 아니라 다수의 일반 독자에게도 전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난해한 나머지 의도를 벗어나 버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볼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문장이 길고 복잡하다. 주어와 술어가 잘 어울리지 않는 곳도 있다. 복문이 연속해서 나오는데 문장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
둘째, 글쓴이는 알지만 독자는 모르는 개념을 너무 많이 썼다. '미학적 전위' '정치적 전위' '미학적 자율성' '미학적 타율성' '치안의 운동' '미학적 운동', 이런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면 그런 말을 연결해서 만든 문장도 이해할 수 없다.
네가 알아듣든 말든, 난 내가 말하고 싶은 방식으로 말할 거야. 그런 태도로 말하는 사람하고는 대화를 하기가 어렵다. 글도 그런 식으로 쓰면 꾹 참고 읽어줄 사람이 많지 않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나쁘게 보면 지적인 허영심이나 자만심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아도 타인과 소통하기 어렵다.
글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 본문 안에서 뜻이 분명하지 않은 말을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 개념어, 전문용어, 고유명, 사건 이름 다 마찬가지다. 꼭 써야만 한다면 적당한 곳에 그 뜻을 알려주는 정보를 함께 넣어야 한다. 어렵기로 악명 높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에마누엘 칸트는, 먼저 시간과 공간 같은 보통명사까지 독자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를 내린 다음 자기의 논리를 폈다. 관습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통 명사인데도 불구하고 엄밀하고 자세한 뜻을 풀이해준 것이다. 하물며 개념어나 전문용어 등 배경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나열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식소매상인 나는 이것을 '업계의 상도덕에 부합하는 영업방침'이라 여긴다.
인생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감정이 여럿 있는데, 허영심도 그중 하나다. 허영심은 아주 고약한 감정이다. 허영심에 빠진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며 의미 없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 글 쓰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허영심은 지식과 전문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에 사로잡히면 난해한 글을 쓰게 된다.
독자가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책임은 주로 저자에게 있다. 말하려는 뜻을 쉽고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영심, 글의 세 번째 군더더기」 독자에게 친절한 작가가 될 것 20.03.06.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