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에 공감한다면, 이걸 읽기 전에 병원부터 가세요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내게 ‘살아야만 할 이유가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라는 질문은 매일 잠에 들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존재다. 그러나 ‘건강한’ 친구들에게 이 질문을 그대로 돌려 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더라.
‘글쎄... 그런 생각을 안 해봐서. 그냥 오늘 뭐하지, 이런 생각 정도는 하는데...’
그들에게는 ‘살아간다’는 것이 당연한 전제인 것이다. 내 얄팍한 지식에 기반한 추측으로도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자기 생존을 위해 움직이니, 생존해야 할 ‘이유’ 자체를 고민하게 된다면 어디엔가 고장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게 좀 심각한 고장이라서, 죽고 싶은 사람에게 삶의 귀중함을 설득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진짜 죽고 싶은 정도가 아닌 날에도, '아, 출근하기 싫다'를 넘어 '왜 사람은 출근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 봐, 하는 제안은 고맙지만 불가능하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 머리를 때리기로 다짐한 적도 있었으나 하도 때려서 두개골만 아플 뿐이었다. 뇌에 불만 대마왕이 사는 거라면 핀셋으로 고놈만 집어 빼내서 한판 붙고 싶은 심정이다. 우울증이고 공황장애고 뇌 속 특정 신경전달물질이 충분하지 않아서라는데, 약으로 분비를 촉진할 게 아니라 주사기 같은 걸로 고농축 물질을 한 방에 충전해 주면 좋겠다고 잠깐 상상해 봤으나, 병원에서 그런 건 안 해 주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한가 보다. 내 뇌는 도대체 왜 고장난 걸까. 사실 짐작 가는 사건들은 있지만, 뭐가 내 뇌에 그리 충격을 준 건지 실은 잘 알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도 그 사건을 막을 수도 없으니 오늘도 나는 그냥 내 뇌에 대한 푸념을 해 보는 것이다.
네가 떠나면 주변인들이 슬퍼할 거야, 아직 못 먹어본 음식과 못 해 본 경험이 아쉽지 않겠니, 남들도 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데 왜 그걸 못 버티니, 넌 분명 이겨낼 수 있어, 너 잘 되려고 액떔하나 보다, 하늘이 시련을 주나 보다, 생명은 소중한 거야, ... 죄다 내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물론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이 고맙긴 하다. (왜 그걸 못 버티냐는 둥 액땜이라는 둥의 이야기는 고맙지 않다) 애초에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정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웬만한 위로나 응원은 오히려 자책으로 귀결된다. 내가 이겨낼 수 있다고? 미안,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야. 정말 실망스럽지? 역시 죽는 게 맞아, 이런 식으로.
그렇게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때'임을 스스로 자각하면, 내 경우엔 일단 다 제끼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밖에 나가 기분 전환을 시도해 볼 수 없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밀집된 곳에 가면 호흡곤란 등 공황 증상이 올라오므로 내겐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다. 애착 인형을 끌어안고 억지로 자고 나면 우울이 좀 가셔 있다. 창문을 보면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게 되니 벽 쪽을 보고 누워야 하고, 과일을 먹고 싶어도 날카로운 과도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지 모르니 껍질을 손으로 까 먹을 수 있는 것만 먹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그냥 안 먹고 만다. 아, 약을 복용하는 건 필수다.
나는 아주 어릴 때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떤 마음을 숨겨야 어른들이 귀찮아하지 않는지 잘 알고, 어떤 감정을 눌러야 어른들이 슬퍼하거나 화내지 않는지 잘 안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그때의 마음과 그때의 감정을 여전히 품속 어느 곳에 돌돌 말아두고 있다. 자신조차 펼쳐보지 않은 그 생채기는 풀지 않은 선물상자로 남아, 그 가치와 역할이 끝내 발견되지 못한 채 먼지 쌓인 빈 박스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모든 마음에, 모든 감정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에도 그것을 부정당하는 것이다. 감정을 숨기거나 스스로를 과하게 채찍질하는 등의 좋지 않은 습관은 유년기에 형성되어 청소년기에 확고해졌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를 옭아맸다. 제때 분출되고 위로받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은 채 곪았고, 그렇게 썩을 대로 썩은 내 마음은 우울증이라는 병에 잡아먹혔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신민아가 우울증 환자 역을 연기하는 것을 보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간단한 행동조차 감기몸살을 앓는 이처럼 버겁고 느릿하며,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뒤에는 숨을 두어 번 몰아쉬어야 하고,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몸에서는 식은땀이 나는지 나지 않는지 분간할 집중력조차 없어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며, 무엇부터 하는 것이 내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지 찾아내고 실현해낼 의지 따위는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증상들에 더해 가끔은 토할 듯이 오열하거나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도 그저 무성의하게 멍하니 보기만 하게 되는, 그 모든 증상이 바로 우울증이다.
웃던 날과 울던 날이 깊숙한 서랍 속 뒤섞여 표정을 잃은 상태에서, 그것들의 입꼬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진정으로 어려웠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며 축적된 아픔들이 나의 우울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 기억들을 헤집고 다시 정렬할 용기가 없었다. 스무 살이 넘어 서울 자취방에서 홀로 잠들 때도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생각나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그걸 차분히 정리하기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디까지 어렸고 여렸는지, 어디까지 어리고 여릴 수 있었는지, 어디까지 어리지 않은 척을 하였고 어디까지 여리지 않은 척에 성공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연극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도 온전히 풀지 못한 평생의 숙제다. 그 숙제를 해 보려 한다.
나는 오지랖이 넓다. 남이 힘들어하고 있는 걸 보면 뭐라도 해 주고 싶다. 상담을 요청하면 (물론 내가 힘들 땐 아무것도 못 해주지만) 최선을 다해 같이 고민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싶다. 다만 내 스스로에겐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1인 2역을 해 보려고 한다. 나 이런 게 힘들더라, 그랬구나, 왜 그게 특히 힘들게 느껴질까, 이런 식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스스로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 보셨으면, 그리고 그런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 위로와 조언을 해 주면 좋을지 고민해보시면 좋겠다.
(경고: 나는 전문 심리 상담사가 아니다. 나는 병원 치료를 몇 년간 받고 있는 상태고, 심리 상담도 전문 기관에서 꽤 받았다. 그런 경험을 기반으로 혼자서도 아픈 마음을 달래볼 수 있게 연습을 해 보려는 것이니, 이 글을 읽으면서 나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고 생각되나 아직 병원이나 상담소를 한 번도 찾지 않은 분들은 꼭 전문 기관부터 가시라. 이 글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