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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김 Dec 28. 2020

시간의 구획이 무너진 세계

아기 키우는 일은 모든 룰의 예외

팀에 새로운 구성원이 합류하면 진행하는 온보딩 프로그램에서 내가 맡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시간 관리다. (나도 잘 못하면서 무슨.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기자 생활할 때도 이미 충분히 잘게 쪼개진 시간을 허덕이며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저널리즘 팀에서의 시간은 비교도 못할 정도류 짧은 단위로 돌아가고 있다. 혼자 하는 일이 거의 없고 팀 안팎의 많은 분들과 같이 하는 일들이 대부분인 데다 결정 혹은 의견 제시를 해야 진행되는 일들이 적지 않다. 한 번에 집중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하루를 온전히 쓰지 못하는 느낌이었고, 일을 분류하고 시간 구획을 설정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온보딩 프로그램에서는 중요도와 긴급함을 기준으로 일을 네 개의 구획으로 나눠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1. 중요하면서 급한 일 2.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 3.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일 4.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일 네 가지다.

먼저 중요하면서도 급한 일은 일의 핵심과 관련 있는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일 경우가 많다. 이메일 회신이나 전화 연락, 미팅 등인데 가능하면 출근해서 아침에 하는 것이 좋다. 커뮤니케이션을 먼저 처리해 둬야 이어지는 시간을 끊김 없는 ‘덩어리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럴 때 하기 좋은 업무가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일이다. 시간을 조각이 아니라 덩어리로 쓸 수 있는 때, 집중력을 높여야 속도와 품질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결과물을 낼 수 있다. 10분씩 쪼갠 1시간과 밀도 있게 연결된 1시간의 쓰임은 완전히 다르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은 사실 진짜 중요한 일일 가능성이 크다. 업의 본질과 관련한 고민, 비즈니스의 핵심을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 모색, 나의 커리어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공부 등일 텐데 이런 경우에는 내가 선호하는, 혹은 일의 특성에 따라 내가 낼 수 있는 특정한 시간 구획을 정해 두는 게 좋다. 이걸 키스톤 해빗이라고 하더라. 아주 중요한 과제를 습관적으로 규칙적으로 수행해 내자는 거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미뤄 버리게 되고 영원히;; 하지 않게 되고, 큰 틀의 성장이나 발전을 모색하기 어려워진다.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일은 흔히 얘기하는 잡일이나 허드렛일, 보조적인 업무다. 이런 일은 아침에 출근해서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한 뒤에 해도 좋고, 핵심 업무를 하다 집중력이 무너졌을 때 리프레시 차원에서 해도 좋은 것 같다. 몸을 쓰거나 단순 노동을 하면 집중력이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마지막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일은 집에 가서 업무 시간 외에 하고, 회사에서는 제거해야 하는 종류의 일이다. 만약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다고 생각된다면, 둘 중 하나다. 중요하거나 급한 일인데 나만 모르고 있거나, 내가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시간 구획을 설정하고 나서의 문제는 그 구획을 컨베이어 벨트처럼 타서 안주하게 될 가능성이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운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어 놓고 개선이나 변화를 모색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결과를 검증하고 결과를 1퍼센트라도 개선할 방법을 찾아서 수시로 시간 구성을 점검,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스스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새로운 과제를 찾는 경우라면 자연스럽게 변화는 일어난다.

물론 이런 방법은 정답도,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출산 휴가 중인 지금이야말로 시간 구획 같은 소리 하고 있네...가 절로 나온다. 아기하고 생활하면 시간이 정말 너무너무 충격적일 정도로 없다. 하루가 그냥 순삭되고 시간은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아지지를 않는다.

일단 시간이 가루 수준으로 산산조각 나 있다. 보통 사람의 시간이 하루, 24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아기 키우는 사람의 시간은 아기의 밥시간에 맞춰서 돌아간다. 한 달 된 아기는 2시간에 한 번 먹는다. 그것도 먹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제외다. 1시부터 30분 먹었으면, 3시부터 다시 먹어야 된다.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하루는 아기 밥 12타임이다. 나한테 주어지는 시간은 1시간 30분이라는 얘긴데, 그 사이에 아기가 잔다면 무조건 같이 자야 한다. 안 그러면 잘 시간이 없다... 그런데 밥도 세 끼 챙겨 먹고 화장실도 가야 한다. 그거 하다 보면 못 자는 거다. 무엇보다 아기와의 시간은 ‘중요하고 급한 일’로만 구성된다. 당장 해야 하고, 안 하면 안 되는 일들이 무한 반복된다.

시간을 시간 같이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을 안 자는 것뿐이지만 출산 후 체력이 무너져서 그것도 안 된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이와 놀아 주라’는 어떤 스님의 얘기에 아기 키우는 부모들이 분노한 건 당연하다.

지금은 아기가 자는 시간, 몰래(?) 글 쓰고 있다. 이제 밥 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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