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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별 아나운서 May 17. 2024

올드미디어의 얼굴, 뉴미디어의 목소리가 되다

[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13]

2010년 03월 01일~2024년 02월 29일

단, 하루도 빠지지 않은 14년이라는 시간을 꽉~ 채우고

KBS를 퇴사한 다음날이었습니다


대학동기 해경이가 오랜만에 카톡을 보냅니다

저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말이죠

'밀리의 서재 X 스푼라디오’가 진행하는

‘오디오크리에이터’ 오디션

워낙 자주 이용하던 ‘밀리의 서재’에 눈이 갔습니다

오디오북도 만들어보고 싶고

KBS에 있을 때에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일들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재밌겠다

그래서 언제까지 하면 되는데?

이런, 마감일이 하루 남았더군요

어차피 전 날까지는 KBS 소속이라 지원할 수도 없었지만

지원이 가능해진 지금은

촉박해도 너무 촉박했습니다


다행히 KBS에서 라디오 PD 생활도 했고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뉴미디어팀 채널도 만들어봤으니

집에도 장비나 준비는 늘 돼있었습니다

얼른 기획을 마치고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스푼라디오’는 10~20대가 주 청취층이니

40대인 저는 포지션을 ‘좋은 선배’로 가져갔습니다

그들이 한 번쯤 해봤을 고민을 들어주는 선배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시행착오’를 들려주면서

‘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선배의 마음으로

‘친절한별선배’라는 캐릭터를 잡았습니다

대본도 없이, 대화하듯 편하게

담담하게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예선과 본선, 몇 번의 미션과 결선을 거쳤습니다

큰 욕심은 없었습니다

그 과정이 재밌고 신기했거든요

방송 촬영이 있어서

결선 생방송은 함께하지 못했는데

알람이 떴습니다


‘축하합니다~’


오디션 최종 우승!

어제까지 공중파 방송의 얼굴이었던 아나운서가

뉴미디어의 새로운 목소리로 탄생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올드미디어의 얼굴, 뉴미디어의 목소리 되다



어제까지 공중파 방송의 얼굴이었던 아나운서가
뉴미디어의 새로운 목소리로 탄생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스푼라디오’는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진로강의,

저는 언론, 방송계의 멘토로 참여했습니다

학생들이 질문하더군요


“아이폰 15와 프로 맥스 중에 고민이에요.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는

작고 가벼운 폰이 유리하지만,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은

카메라도 좋고 용량과 배터리도 넉넉한

프로 맥스가 답이라서요”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이 스마트 폰을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콘텐츠’였습니다

그것도 소비와 생산,

스마트 폰을 활용하려는

자신의 목적이 명확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들은 자신의 콘텐츠와 채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튜브와 SNS, 스푼라디오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방송을 만들고,

직접 진행자나 DJ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마트 폰 하나로 스스로 미디어가 될 수 있고,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스푼 DJ가 되기 위해

성우 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플랫폼을 이용해서 용돈을 벌고 있는(후원, 1스푼에 110원),

그 어렵다는 ‘수익을 올리는’ 크리이에터였습니다


그들에게 ‘스푼라디오’는

그저 콘텐츠를 소비하는 플랫폼이 아닌

콘텐츠를 생산하며 수익도 올리고,

소통하며 즐기는 일종의 놀이터였습니다

저의 직업과 업무가

그들에게는 일상이고 놀이이며,

소통창구였습니다

저는 그저 신기한 눈빛으로

그들에게 묻고 또 물으며

그 세상을 살짝 엿보고 있었습니다


반면, 그들은 저의 직업을 알고 있었지만,

아나운서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나운서에 대해

‘누가 써준 원고 읽는 사람 아니에요?’라는 장난 섞인 질문에

‘절대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은 이미 스스로 기획하고 원고를 쓰며,

직접 찍고 편집하는 ‘콘텐츠 생산자’였기 때문입니다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이미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일종의 놀이인 그들에게

저는 ‘아나운서’ 보다 ‘크리에이터’로서 더 궁금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나운서’를 궁금해하지 않더군요



그들은 저의 직업을 알고 있었지만,
아나운서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KBS라는 아주 좋은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 미디어 시장을 바다에,

방송국과 각종 미디어를 배에 비유했을 때

KBS는 그 어느 배보다도 크고 튼튼하죠

국가 기간 방송사로서

시청자의 수신료로 운영됩니다

시스템과 규모, 인력 운영의 노하우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방대한 아카이브는

KBS의 자랑입니다


KBS라는 배에 타고 있으면 참 편하고 든든했습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KBS라는 배 안에서라면

구성원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고요


변화의 시작은 ‘육아휴직’이었습니다

KBS 남자 아나운서 최초로

육아휴직에 들어갔습니다

시청자로서 바라본 KBS

솔직히 말해서 저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KBS 프로그램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모니터나 의무감에 본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제 생활 속에 KBS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한 KBS는

기나긴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자식과도 같은 방송을 내려놓고 거리에 나온 구성원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저희가 방송을 멈췄는데,

사람들의 삶은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불편함 없이 다른 선택지를 활용해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KBS도 파업했어요?”


심지어 저희의 파업을

모르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불편함이 없으니, 변한 게 없으니

파업 자체를 모르시는 분들도 많았겠죠

그렇게, 저희는 점점 힘을 잃고 무기력해 갔습니다


그때부터 퇴사를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코로나19로 계획이 많이 늦어졌지만

덕분에 한 발짝 떨어져서,

더 냉정하게 판을 들여다본 것 같습니다

더 치열하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KBS에 다니는 동안,

뉴스 앵커, 아나운서로서는 쉽게 할 수 없었던

‘내 이야기’를 할 준비를 말이죠



그들은 더 이상 ‘아나운서’를 궁금해하지 않더군요



방송에서 하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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