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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별 아나운서 May 22. 2024

작은 것에 감사하고, 내 삶에 조금 더 친절하기

[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14]

분명 어제까지 매일 메이크업을 받고,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한 조명 앞에서 뉴스를 전했는데…

수많은 관객 앞에서 웃으며 인사하고

박수를 받으며 방송을 진행했는데…

지금은 고요한 집에서

아직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와 단 둘이

고군분투하던 나


마음은 의욕으로 가득하지만

아직 새벽 뉴스앵커의 그것이어서

아직 100일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2시간마다 일어나는 아이 때문에

하루 종일 몽롱한 상태였던 나

불과 몇 시간 만에

배테랑 아나운서에서 초보 아빠로

저는 180도 다른 존재가 되었어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고민하고 걱정하던 첫 번째 육아휴직의 나에게

지금 두 번째 육아휴직의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걱정 마. 넌 분명 맞는 선택을 한 거고, 아주 잘하고 있어.’


불과 몇 시간 만에, 배테랑 아나운서에서 초보 아빠로 바뀐 내 모습


잘하고 싶었고,

인정도 받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은 떠올리지도 못하고

눈앞의 목표 자체만 바라보며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KBS 남자 아나운서 중에는 처음으로 육아휴직까지 할 줄은

그래서 본의 아니게 ‘육아휴직의 아이콘’처럼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멈춰있는 나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잠시 쉬는 나는 더더욱 상상조차 안 됐으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그런 상황이 생긴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아니라면, 외부에 의해

강제로(?) 쉬는 상황이 생긴 것 같기도 합니다


‘KBS, 아나운서’라는 옷을 벗고 ‘윤슬이 아빠’로

정장과 협찬 옷을 벗고,

목 늘어난, 아이의 침이 묻은 티셔츠를 입고

아이를 안고 있을 때의 나

어쩌면 더 ‘나다운’ 상황에서 저는 더 행복했습니다

솔직하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내가 된 느낌이었어요

작지만, 그러나 더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

저는 더 많은 것들에 감사하게 됐습니다


아이가 트림만 잘해도

아이가 잠만 잘 자도

아이가 똥만 잘 눠도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에는 누군가의 인정도

내가 생각하던 성공과 성취도 없었지만

더 자주, 더 많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그 감사함을 찾게 되니 삶이 더 풍성하게 느껴졌고요

그리고 그 감정들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 마음속 더 깊은 곳에 간직하고 저장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이가 트림만 잘해도
아이가 잠만 잘 자도
아이가 똥만 잘 눠도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어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일단 내 삶을 긍정하고 감사하고 좋게 바라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면

적어도 내 삶에 대해 감사하고 긍정적인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를 만들 수 없었던 순간들

그 순간들에 대해서 나는 사실

너무나 힘들고 아팠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마주하기 싫지만,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다고 거짓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순간

나와의 화해는 더 어려운 일이 되겠죠

조금 더 내 삶을 사랑하고

나에 대해 인정하고 나와 화해를 할 수 있다는 증거로

어쩌면 저는 오늘도 글을 쓰고

내 삶에 대해 더 자세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만들었던,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갑옷, 일종의 냉소주의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나를 지켜야 했고

그래서 지금의 나를 그나마라도 지켜 낼 수 있었고

지금 여기에서 나를 찾는, 육아(我)휴직을 하고 있어요




두 번째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때의 갑옷을 벗는 작업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여유가 생기고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겼죠

내 삶과 내 주변에

조금 더 다정하고 친절하려고 노력하게 됐어요


그것이 나를 찾는, 육아(我)휴직의 첫 번째 단계였고

결국 그것이 내 삶에 대한 긍정이고

내 삶에 대한 사랑이고

나에 대한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친절할 때

우리 뇌에서는 세로토닌과 도파민 분비가 증가된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내 삶에 친절하게 했던 나의 행동이

결국 나의 뇌를 행복하게 하고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거죠


친절함도 다정함도

결국은 나를 위한 행동입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작은 것에, 더 자주 감사하고

내 삶에 조금 더 친절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말이죠



결국 그것이 내 삶에 대한 긍정이고
내 삶에 대한 사랑이고
나에 대한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김한별아나운서

#김한별작가

#나를찾는육아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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