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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별 아나운서 Jun 07. 2024

기꺼이 낭비하는 삶

[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17]

평일 오후 2시, 하늘이 너무 예뻤습니다

헬스장을 향하다 말고 잠시 멈춰 생각해 봤습니다

‘이건 너무 귀하다’


요즘 자주 쓰는 혼잣말, 귀하다

그만큼 ‘귀하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하루에 대한 느낌,

나도 모르게 자꾸 되뇝니다, 귀하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저를 공원으로 이끌었습니다

매일 쫓기듯 살던,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뉴스 생방송을 하고,

나보다는 어쩌면 남을 위해 ,

내가 좋아하는 얘기보다는 남들이 듣고 싶었던 얘기를 전달했던 나

그런 내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조금은 이기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지금

문득 행복하다 느꼈습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렇게 평소였으면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을 그런 순간

어쩌면 인생의 낭비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

문득 행복하다는 감정이 들었고

효율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지극히 계획형, 극 J형 인간의 판단으로는

비효율적인, 낭비의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저는 지금

기꺼이 내 삶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참 좋았습니다




기꺼이 내 삶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그게 참 좋았습니다



그동안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하루에 대한 느낌,
나도 모르게 자꾸 되뇝니다, 귀하다



내 삶을 낭비할 수 있는 용기, 여유

청춘의 특권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직 실패도 성공도 경험하지 못해서,

여유도 기회도 많아서,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는 시기

저는 그것을 청춘이라 정의했습니다

무모했고, 서툴렀고,

그래서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청춘

그래서 청춘은 낭비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아름다웠고 부러웠습니다

그렇기에 찬란했던 것 같습니다


평일 오후 2시의 시간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여유,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청춘의 하루를 보내는 중입니다

40대에도 청춘을 떠올릴 수 있다니!

참으로 귀한 순간이네요!

너무 아까워 일부러 천천히 걷는 중입니다

평소에는 늘 걸음이 빨라서 뿌듯한 저였는데..

여유, 그런 완급조절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그렇게 조금 속도를 늦추니

자연스럽게 고독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나와 마주 하기 위해 필요한 것, 고독의 시간과 공간

육아 휴직을 하게 되면서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둘러싸여 방송을 하던 제가 아니었습니다

뉴스 앵커, 아나운서, DJ, 예능 MC 김한별 이 아닌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남편,

인간 김한별을 오롯이 마주 하게 되더군요

이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의외로 이런 경험을 갖기가 쉽지 않았어요

낭비하는 시간, 고독을 즐기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죠


저는 누구보다 알차게 시간을 쓰는 ENTJ입니다만

돌아보면 행복의 순간은

늘 그렇게 계획하지 않은, 허비한 시간이었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은 진짜 낭비일까요?

시간이 지나 2024년의 나를 떠올리면

돌아오고 싶은 쪽은 치열한 나일까요? 낭비한 나일까요?

과연 어느 쪽일까요?


적어도

오늘 만난 예쁜 하늘과 따뜻한 햇살,

시원한 바람은 결코 잊고 싶지 않은

보석 같은 선물이네요

기꺼이 낭비하며,

일단 이 청춘을 만끽하고 싶네요

아주 천천히 말이죠




청춘은 낭비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아름다웠고 부러웠습니다
그렇기에 찬란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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