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19]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하는 '직업'이라면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렇게 나의 행복을 결정하던 존재가
한 순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다면
그때 그 사람이 느낄 허탈감과 실망감은 얼마나 클까요?
네, 그 주인공은
'아나운서 최장수 음악프로그램 MC'였던 저와
음악프로그램 'KBS 콘서트 필'이었습니다
행복과 아픔, 기쁨과 슬픔을 모두 안겨준 프로그램
그렇게 '콘필지기'로 살아온 7년의 시간은
저에게 너무나 특별한 선물이자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첫사랑입니다
KBS 본사에서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발령받을 근무 지역을 선택해야 할 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광주를 선택했습니다
순전히 콘서트필 MC가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어차피 서울에서만 나고 자라서
지역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콘서트 필'이 있었고,
'음악 프로그램 MC'가 되고 싶은 저에게는
당연히 가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MC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남자가 무슨 예능이야? 남자는 시사나 토론을 해야지"
'남자가 무슨' 이라는
고리타분한 편견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동안 콘서트필 MC는
모두 '여자 아나운서'였습니다
그 편견을 깨는 것이
아나운서 합격보다 힘들었습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콘서트 필 녹화가 있는 날 녹화장을 찾아가,
녹화 사이 쉬는 시간이나 무대 세팅이 필요한 시간
마이크를 들고 무대로 올라가 '사전 MC' 역할을 했습니다
관객분들을 즐겁게 하고, 필요하면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때마다 '남자가 무슨'을 외치는 부장님께 혼났지만
꿋꿋하게 방송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과
그동안 했던 음악 작업,
어렸을 때부터 모았던 1만 여장의 음반을 통해
'음악프로그램 MC'로의 전문성을 어필했습니다
프로그램 코너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고요
(아직) 내 프로그램이 아니었지만 사랑하고 표현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아나운서들과는 다른 색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PD와 작가에게
또 다른 선택지를 제시한 거죠
그렇게 저는 콘서트필 MC가 되었고
콘서트필의 최장수 MC가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추억'은 영상이 아닌 '사진'처럼
한 장면으로 기억된다고 하죠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장면 하나!
우리가 흔히 공연은
무대에서 관객에게 노래를 '전달'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MC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에너지, 그러니까 공연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은
무대가 아닌 객석으로부터 나옵니다
다름 아닌 박수와 환호로 공연은 시작합니다
첫 에너지를 주는 것은 관객입니다
박수와 환호로 객석에서 무대로 에너지를 전달하면
그 에너지를 받은 무대 위의 아티스트는 공연으로 응답하죠
그 공연을 받은 객석에서는
더 큰 에너지를 무대로 전달합니다
그러면 아티스는 그 에너지를 받고 감동하죠
서로를 아끼고 응원하며 함께 공연을 만들어갑니다
아티스트 못지않게,
공연을 만드는 주인공, 바로 관객입니다
다른 누구도 볼 수 없는,
음악프로그램 MC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왼쪽에는 객석, 오른쪽에는 무대를 담고
MC는 서로의 대화를 바라봅니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지금 떠올려도 가슴 벅찬 기억이네요
그렇다고
음악프로그램 MC가 가만히 즐기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저도 밥값을 해야 하니
그 공연이 최고의 공연이 될 수 있게 나름의 필살기를 준비합니다
음악방송을 진행하면서 얻은,
녹화, 공연을 무조건 성공시키는 노하우 하나!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에 오르기 전,
가수분이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
(공연 직전 아티스트는 예민할 수 있으니 이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아티스트의 앨범을 들고 꼭 인사를 나눕니다
워낙 제가 갖고 있는 음반이 많아서
원래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음반들이기도 하고
방송을 위해 미리 구매해서 들어본 음반들이죠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아세요?'
무대에 오르기 전
음반을 미리 들으면서 들었던 궁금증들로 대화를 이어가면
대부분의 아티스트 분들이 매우 좋아하십니다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음반을 정성껏 들었다는 의미니까요
일종의 아티스트 '기 세워주기'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아티스트는 더 좋은 무대를 보여주죠
진행자는 진행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방송을, 무대를 책임지는 사람이 바로 진행자니까요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고
열과 성을 다해 지키고 싶었던 프로그램이
바로 '콘서트 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아침에 MC, PD, 작가를 교체하더니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3개월 뒤, 콘서트 필은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서로를 아끼고 응원하며 함께 공연을 만들어갑니다
아티스트 못지않게,
공연을 만드는 주인공, 바로 관객입니다
그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콘서트 필'은 추억이 되었고
방송 환경도 미디어의 주도권도 변했습니다
솔직히 힘이 많이 빠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습니다
인정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용기가 부족했던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그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지다 보니
휴직을 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니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은 그대로 놔두고
필드를 바꿔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다른 운동장에서는 여전히 경기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운동장,
앞으로는 경기가 없을, 관중도 남지 않을 운동장에는
예전의 환희와 영광은 그저 그 자리에 두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질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추억 속에서 반짝이고 있을 뿐
가끔 떠올리며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스포츠로 비유했을 때
얼마 전까지 저는 은메달 상황이었습니다
손을 뻗으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얻을 것만 같은 금메달이 보였죠
그럼에도 결국 손에 닿을 수 없는
(끝까지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나)
금메달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은메달 상황이었습니다
휴직과 퇴사,
인정과 내려놓음
객관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볼 때
지금은 은메달도 아닌 동메달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메달일 때보다 행복하다면 믿어지실까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비교의 대상이 달라져서일까요?
일상, 훈련, 일, 성취, 모든 것이 즐거운 요즘
결국 얻지 못할 금메달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는
은메달 하나일 때의 나보다
다양한 분야의 동메달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지금의 나
뭐가 더 행복한 선택일까요?
은메달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의지 자체가 안 생겼습니다
아무리 해도 금메달은 손에 닿지 않았으니까요
동메달 상황인 지금은 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실력이나 노력과 의지는
은메달 때의 그것을 확실히 넘었으니까요
직접 하는 제가 몸으로 느낄 정도니
적어도, 은메달의 나보다 동메달인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잘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매일 성장 중이고 말이죠
비록 목에는 은메달이 아닌 동메달이 걸려있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즐겁게 성장하는 지금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성장하고 늘어 가고 있는 지금
저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음악프로그램 MC' 복귀라는 꿈이요
물론 예전과는 다른 운동장일 겁니다
방송 플랫폼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방식의 '음악 프로그램 MC'를 하면 되는 거죠 뭐
음악과 공연, 관객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즐기는 방식, 플랫폼은 더욱 다양해졌으니까요
무대 위에서 수 천, 수 만 명을 만나던
'음악프로그램 MC'였던 저는 요즘
새로운 방법, 더 가까운 거리에서 음악을 들려드리고 있습니다
효율과 빨리빨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
다양한 음반과 이야기로 음악을 들려드리고 있어요
손가락 한 번이면 수만 곡을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기꺼이 불편하게 음악 듣는 거죠
더 소중하게, 한 곡 한 곡 아껴가며 음악을 듣고
그 안에 추억과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게 말이죠
가끔 LP바에서 디제잉을 할 정도로
음반이 많은 제가,
그 음반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해드리면
느리고 불편하게, 그 노래를 곱씹어주시더라고요
어쩌면 음악을 모으는 행위는
음악을 내 것으로, 낯설게, 특별하게 간직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음반, 감정, 이야기, 추억을 종합적으로 모으는 행위인 거죠
숫자와 효율적인 것은 어른의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하지만, 낭만과 비효율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소년이 되는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감성과 낭만은 비효율 적이지만
어쩌면 충분히 낭비할 수 있는 부자 같은 느낌입니다
낭만도 노력이 필요하더군요
할 수 있을 때 노력하려고 합니다
최대한 오래 즐길 수 있게 말이죠
방법은 조금 달라졌지만
'콘서트 필' 때와의 그것과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방향은 조금 달라졌지만
그 공간에서의 감동과
그때 했던 노력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은메달을 내려놓고,
지금 목에는 동메달이 걸려있지만
이렇게 행복하게, 더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지금
만약 어느 순간 나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어쩌면,
내 목에, 그토록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었던 금메달이 걸려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