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재영은 눈앞에서 창에 달린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조각조각 맞고 있는 남자에게 꽤 빠져 버렸다. 사실 ‘꽤’는 자존심에 수준을 낮춘 표현이고, 재영의 깊은 내면은 ‘폭’ 또는 ‘퐁당’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람의 눈이 어떻게 저럴까. 웃을 때마다 눈꼬리 주위로 자글자글하게 접히는 주름이 미친 듯이 귀여우면서 섹시하다고 재영은 생각했다.
재영은 남자의 가지런한 치열로 성정을 짐작했고, 오래된 원목 나무처럼 각진 턱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재영의 눈이 남자의 입가까지 닿았을 때, 그 입술이 움직였고 웃었고 치아와 잇몸이 보였다. 그리고 말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어쩜 시간이 흘러 더욱 깊이를 더하는 현악기 같달까. 재영은 괜히 머리칼을 매만지며 울림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응, 근데 뭐라는 거야? 재영은 혼비백산한 채로 입을 열었다.
“네, 네? 저한테 말씀하신 거죠? 뭐라고 하셨죠?”
남자는 입가에 묻은 것은 없는지 손으로 쓱 문지르며 다시 말했다.
“아, 음식 정말 맛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재영 씨도 식기 전에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재영은 다소 민망스러웠기에 잔잔한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하고 포크를 든 손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그들은 지금 한 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재영이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찾는 곳으로, 한마디로 소울 식당. 재영은 지겨우리만치 매주 똑같은 메뉴를 먹었다. 라자냐, 버섯크림파스타, 카프레제샐러드. 주인은 재영과 동갑내기인 서른두 살 쌍둥이 형제로, 재영이 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어디서 어떻게 공부해야 이런 맛이 나는지 모르겠다, 라는 ‘흠뻑’ 빠진 말들. 처음 식당에 방문해 재영이 주인 형제에게 건넨 말은 이러했다.
“층층이 쌓인 라자냐 면과 베샤멜소스 그리고 라구소스 그 위에 모차렐라 치즈까지. 포득, 하고 한 입 씹자마자 입안 가득 퍼지는 깊은 풍미에 눈을 부릅뜨게 되는 맛이랄까. 버섯크림파스타는 또 어떻고. 꾸덕꾸덕한 특제 크림소스에 푹 배인 새송이버섯,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각종 식감의 버섯들과 두 번째 손가락 반 마디 정도 크기의 리가토니 파스타 면의 조화란. 반으로 자른 토마토에 모차렐라 치즈, 그리고 상큼하고 진한 바질페스토소스를 올리고 푸릇한 초록 채소들과 함께 먹는 카프레제샐러드라니. 아, 너무 맛있어요.”
매주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누구와 약속도 잡지 않고 이 식당에 재영이 혼자 오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모든 걸 다 먹기 위해서. 이 음식들을 위해 천천히 오래 씹을 체력을 장전할 요량으로 아침 러닝을 시작했고, 위장의 크기를 늘리기 위해 한 달에 50그램씩 총 다섯 달간 탄수화물 양을 증량했다. 그 이후에야 재영은 세 가지 종류의 음식을 다 먹지 못해 한스러운 감정에 휩싸일 일이 없어졌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지난 일 년간 재영의 낙은 이 ‘오후의 햇살’이라는 식당이었으니까.
주인 형제는 원테이블 식당에서 혼자 방문해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재영을 보고 놀랐다기보다는, 재영의 의지에 경의를 표했다.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위해 운동을 시작하고 몸무게를 늘리는 사람을 보며 순수하게 행복해했고 동시에 안타까워했다. 그것이 지나친 오지랖이라는 것을 본인들만 모른 채로. 재영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서만 즐거워도 되는데, 그래도 되는데. 주인 형제는 한사코 누군가를 만나 보라며, 원한다면 소개도 해 준다고 했다. 재영은 상대의 기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억지스러운 만남을 거부했다.
그런 재영에게 주인 형제가 내놓은 안은 의외로 이벤트였다. 삼 일간 커플이 되고 싶은 남녀에게 신청을 받은 뒤 무작위 추첨을 통해 함께 식사를 하는 이벤트. 재영은 나쁘지 않다기보단 꽤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기꺼이 추첨을 했으며 그렇게 만난 사람이 눈앞의 남자, 강주완이었다.
주완이 저는 화가예요 말했을 때 재영은 저는 카페 사장이에요 답했고, 주완이 저는 초록색을 좋아해요 말했을 때 재영은 저는 보라색을 좋아해요 답했고, 주완이 이런 거 신기해서 좋네요, 라고 말했을 때 재영은 큰 웃음소리로 답했다. 이 대화가 핑퐁 같다고 재영은 생각했고 주완도 그럴 것이라 속으로 느꼈다. 그 후 재영과 주완은 공식에 따르지 않고 서로를 알아 가는 질문을 자유로이 가벼운 잽을 날리듯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재영은 그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주완은 라울 뒤피의 그림이 그려진 남색 그릇이 아름다워 이벤트에 참여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릇이 갖고 싶었는데 인터넷에 찾아봐도 브랜드 콜라보 한정판이라 구할 수 없었다고. 이벤트를 통해 커플이 되면 원하는 그릇을 줄 수도 있다는 주인 형제의 말에 냉큼 신청했다고.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재영은 햇살이 오래도록 그의 눈가에 머무르기를 기도했다. 밝은 빛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마는 그에게, 피어오르는 사랑의 눈길로 쳐다보고 마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면서 동시에 들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재영이었다.
주완이 잠시 전화를 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재영은 급하게 의자를 드르륵 뒤로 밀며 주방에 있는 주인 형제에게 다가갔다. 묻고 싶은 것투성이였다.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말할 시간이 충분할지 여러 가지를 머릿속에서 조합해 보느라 정작 튀어나온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맞지?”
당신들이 추첨을 빙자해 소개해 주려는 사람이 혹시 저 남자냐는 말, 자신과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것에 동의하냐는 말, 이거 아무래도 ‘그린라이트’ 같은데 제대로 이해한 게 맞냐는 말이 응축된 표현이었다.
현석은 재영의 말을 용케 알아듣고는 웃으며 말했다.
“놓치지 마래이, 이게 웬 굴러들어온 복덩이고.”
현석에 이어 현진도 입을 열었다.
“재영아, 얼른 가서 앉아라. 주완 씨 들어온다 야.”
짤랑이는 풍경 소리가 들렸다. 재영이 주방 문턱을 밟고 내려왔을 때 서로 눈이 마주쳤다. 주완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