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음식은 (2인분을 혼자 다 먹는 재영을 배려해) 3인분이었고 라자냐와 버섯크림파스타는 반쯤 먹어 치운 상태였다. 샐러드는 손을 거의 대지 않았는데, 재영이 와인과의 조합이 기가 막히니 나중에 천천히 먹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재영은 때가 됐다 싶어 무초마스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고, 가성비 와인이니 나중에 하나 더 시켜도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기뻐했다.
잔을 연신 부딪치며 대화를 이어 나가던 중에 창밖은 어느덧 해가 저물었고 코발트블루색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들만이 빛나고 있었다. 창틈 사이로 저녁의 찬 공기가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주완의 눈가는 자유로웠지만 재영은 그를 향한 눈길에 담긴 마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음식이 바닥을 보일 무렵, 현진은 생초콜릿이 담긴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이건 서비스. 주완은 환히 웃으며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았고, 재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주완을 안 좋아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불가항력이라고. 생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고 와인을 홀짝거린 재영은 술기운을 빌려 고백, 이라는 것을 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주완이 다시금 전화를 한다며 자리를 비웠을 무렵, 주완보다 몇 분 일찍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현석이 말했다. 그의 말에서는 옅은 탄내가 났다.
“놓치지 말란 거, 힘들 수도 있겠는데.”
현진이 자신의 구레나룻을 따라 턱수염을 매만지며 현석을 쳐다봤다.
“뭔 말인데.”
현진이 설명을 요구하자 현석은 한마디만 남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전화하는 표정 말이다. 뭘 잘못한 강아지 같다 아이가.”
재영은 이미 만취 상태였고, 형제의 대화는 사고 회로 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사실 무시하고 싶은 것에 가까웠다. 주완은 그사이 다시 문을 열었고 현진도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재영은 자리를 비워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는 주완을 지그시 쳐다봤다. 주완의 표정에 일말의 당혹이 스쳤지만, 재영은 그것을 허락으로 파악하고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주완이 자신의 의자에 앉자마자 재영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내 마음 알고 있죠, 라고 물었다. 주완은 미세하게 웃으며 알긴 하죠, 라고 답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재영은 만족했고 주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현석과 현진은 배웅을 생략하고 그릇만을 포장해 건넸다. 다시 올 때는 4인분을 준비해 놓겠다는 말도 함께. 주완은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릇을 받아 들고는 재영과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갔다. 재영은 계속해서 낄낄댔고 주완은 그런 재영을 제지하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은 듯 느꼈을 때 재영은 택시에 타 있었고 주완은 옆에 없었다. 재영은 마냥 기분이 좋아 택시 기사에게 저 남친 생겼어요, 라고 수줍은 듯 고백했다. 택시 기사는 축하한다고 짧게 말했다. 귀찮은 취객을 대하듯 성의 없는 말투였다. 재영은 그래도 좋았다. 현석과 현진의 말을 진작 들을걸, 누군가의 웃음과 입술과 치아와 목소리에서 오는 감정이 이리도 아찔하고 설렌다는 것을 진작 알려 주지. 세 종류의 음식을 입안에 가득 넣을 때의 행복보다 세 배는 더 황홀한 감정이라고 재영은 다시 낄낄대며 생각했다.
쓰러지듯 잠들고 일어나자마자 카페로 출근한 재영은 오전 열 시쯤이 되자, 주완의 번호를 모른다는 사실과 어젯밤 주완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재영은 곧바로 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에서 나는 진한 술 냄새에 잔뜩 인상을 구긴 채로.
“우리 연인이잖아? 나 엄청 꽐라였는데 걱정이 안 됐나?”
현진은 조금 이상하다고 수화기 너머로 말했고, 그릇이 많이 비싸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 그걸 왜 준다고 했어.”
재영이 따졌을 때 현진은 침울한 목소리였다.
“제일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우리가 너에게 소개해 주려는 사람보다 더 괜찮았다고. 그래서 냉큼 추첨인 척 이어 준 건데…….”
전화를 끊기 직전 현진이 어딘가를 벅벅 긁는 소리가 들렸고, 재영은 괜히 화가 나서 현진이 알려 준 주완의 번호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세 통을 걸어도 받지 않았다. 일하느라 바쁜가 보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는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릇 얻으려고 수작 부린 건가? 근데 그 눈은 도통 거짓말하는 눈은 아니었잖아.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길 때면 아르바이트생이 실수를 저질렀고 수습하느라 재영은 정신없이 일했다.
카페 문을 닫을 무렵, 다시 전화를 걸어도 신호음이 울리다 말고 부재중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이거 번호 차단 각인데, 재영은 꿈을 꾸는 듯 느꼈다. 어제 있었던 일이, 생애 첫 남친이 사기꾼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왔을 무렵, 현석에게서 문자가 왔다.
[봐라, 이거 그 새끼 SNS다. 내가 강주완이라는 이름 싹 다 뒤졌다. 영 찝찝하더라니, 완전 미친놈이다.]
재영은 링크를 클릭하지 않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뭔 소리야?]
[그릇에 미친놈.]
주완의 SNS에는 ‘오후의 햇살’에서 가장 예뻤던, 어떤 손님이라도 갖고 싶다고 탐냈던, 현석과 현진이 가장 아꼈던, 그리고 가게에서 가장 비쌌던 남색 그릇을 닮은 그림이 최신 게시물로 올라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릇’.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그릇의 실물 사진이 열 장 넘게 찍혀 있었다. 재영은 치를 떨었다. 이용당했다는 사실보다 주완에게 보인 마음이 너무나 치욕스러워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좋아하는 마음이 같았을 것이라고 함부로 추측한 자신을 세상에서 지우고 싶었다. 재영은 자신의 마음을 탓했다. 그게 덜 못나 보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사람 마음 가지고 놀지는 말아야지. 재영은 젖은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쓸어 올렸다. 이건 잘못한 거지. 왜 내 고백을 받아 줬는데. 재영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범람하는 것을 느꼈다. 자꾸만 몸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범람 사이로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알긴 하죠.
주완이 자신의 고백에 그렇게만 답했다는 것이 이제야 기억이 났다. 어제 먹은 라자냐, 버섯크림파스타, 카프레제샐러드가 한데 뒤엉킨 듯 역한 냄새가 속에서 위로 올라오는 것 같더니 이내 메슥거렸다. 재영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급하게 발을 놀리면서 당분간은 이 음식들을 먹지 못할 것이라고 재영은 생각했다. 막상 변기에 얼굴을 처박으니 토가 나오지 않았다. 울렁거림도 줄어들었다. 맥이 풀려 변기 옆에 쪼그려 앉아 화장실 바닥의 격자무늬 타일을 보고 있으려니 그저 이런 상황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조금 억울해졌다. 당분간이라도 사랑하는 음식들을 먹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당장 혼자서 4인분을 먹고야 말겠어, 하고 고쳐 생각하는 재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