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책 중 못보던 책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있어 우연히 만났다.
가학과 냉소로 얼룩진 삶의 껍질
환유와 은유의 경계에서
육체에 씌어진 내면의 기억들
주인공 '나(H)'는 우연히 연극을 보러 갔다가 조각가 장운형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의 조각은 단순한 형상을 넘어 인체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었고,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연극 뒤풀이 자리에서 그와 마주한다. 그 자리에서 장운형의 작업 방식, 특히 사람의 신체를 석고로 떠내는 독특한 기법에 대한 의문이 싹트지만, 곧 그의 존재 자체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흘러 장운형은 돌연 자취를 감추고, 실종한 오빠를 찾고자 노력하는 동생이 찾아온다. 유품으로 남겨진 노트를 읽어봐달라고 부탁하면서 그 노트에 담겨진 그의 삶과 예술적 여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로 소설은 흘러간다.
장운형은 어린 시절부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였다. 어머니의 이중적인 미소, 빗나간 삶을 살던 삼촌의 잘린 손가락처럼, 그는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고통과 비밀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러한 감수성은 결국 그를 조각가의 길로 이끌었다.
조각가로서의 삶에서 그는 비만한 여대생 L과 만나게 된다. L은 주목받지 못하고 놀림받는 자신의 모습을 싫어했지만, 장운형은 그녀의 내면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석고 작업을 제안한다. 그 작업을 통해 그녀는 조금씩 마음을 열지만,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에게 당한 상처는 그녀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후에도 L은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점점 변해간다.
장운형은 또 다른 인물, 인테리어 디자이너 E를 만난다. 외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그녀는 사실 육손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상처를 입었고, 그 기억은 그녀를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장운형은 그녀의 차가운 겉모습 뒤에 숨겨진 본질을 발견하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그들은 서로의 몸을 석고로 떠내며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게 된다.
2년 후, '나'는 장운형의 유고전에 초대받는다. 그의 가족들은 그의 실종 이후 남겨진 작품들을 전시하며 그를 추모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쌍의 남녀를 목격하는데, 그들은 마치 장운형과 E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 보려 하지만, 그들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프롤로그
그 안은, 시커멓게 비어 있었다.
마치 벗겨낸 가족을 기워놓은 것처럼, 작가는 조각조각 나누어 뜬 석고의 껍질들을 붙여놓았다. 필시 고의적으로, 섬세하게 이음선을 다든는 대신 오히려 덕지덕지 석고를 덧이겨놓았다. 마치 거꾸로 솔기가 보이도록 박은 옷처럼.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일그러진 괴인간처럼. 폭사한 시체를 수습해 꿰매놓은 것처럼. (p.11)
진실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 - 소화해내야만 하며 - 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p.62)
가장무도회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313)
『그대의 차가운 손』은 단순히 조각 작업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처와 그 치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철학적이고도 시적인 작품이다.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진실과 그것을 고정시키는 조각의 행위는, 드러내기와 감추기 사이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듯 하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나는 어떤 탈을 쓰고 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