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노벨상수상작 추천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은 작가의 개인적 기억을 통해 프랑스 현대사를 투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서술된 작품이다. 아니 에르노의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부터 사회적 변화의 큰 흐름까지, 자신이 경험한 시대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일반적인 소설도 아니고, 사실적인 기록을 나열한 것도 아니고, 처음 만나는 독특한 서술 방식이다 보니, 내가 이해하는 것 맞나? 싶어서 출판사의 소개들도 찾아보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특정 목차가 있거나, 일반적인 소설처럼 설정된 스토리가 있는 책이 아니다.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 『세월』은 1941년부터 2006년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사진첩을 넘기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린 작품이다. 노동자 계급으로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파리 교외에서 교수와 작가로 활동한 현재까지, 에르노는 자신의 변화와 시대적 흐름을 함께 기록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은 아니다. 작가 혼자만 바라보는 시점이 아닌 ‘그녀’, ‘우리’, ‘사람들’ 같은 비개인적인 시점을 통해, 개인의 이야기를 세대와 사회의 집단적 기억 속에 위치시키며, 개인적 삶과 공동의 기억을 융합한 독창적이고 깊이있는 작품이다.
그렇다. 우리는 잊힐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심각해 보이며, 버거운 결과로 보이는 것들, 바로 그것들이 잊히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 우리는 언젠가 엄청나고 중요하게 여겨질 일이나 혹은 모잘것없고 우습게 여겨질 일을 알지 못한다. (중략) 지금 우리가 우리의 몫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늘의 이 삶도 언젠가는 낯설고, 불편하고, 무지하며, 충분히 순수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온당치 못한 것으로까지 여겨질지도.
안톤 체호프 <세자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쌓인 사전은 삭제될 것이다. 침묵이 흐를 것이고 어떤 단어로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입을 열어도 '나는'도, '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세상에 단어를 내놓을 것이다. 축제의 테이블을 둘러싼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며, 먼 세대의 이름 없는 다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p.19)
점점 빠르게 등장하는 것들은 과거를 밀어냈다. 사람들은 용도를 묻지 않고 단지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으며, 당장 그것의 값을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했다. 그들은 수표를 작성하는 데 익숙해졌고, '간편한 지불', 소비자금융 대출을 알게 됐다. 그들은 새로운 것에 어색함이 없었고 청소기와 전기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호기심이 의심을 앞섰다. (p.114)
우리는 여성들의 역사를 돌아봤다. 성적인 자유, 창조의 자유, 남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브리엘 뤼시에르의 자살은 몰랐던 자매의 죽음처럼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엘뤼아르의 시를 인용하며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고 했던 퐁피두의 교활함에 분노했다. 여성 해방 운동의 들썩임은 지방에서부터 시작됐다. (p.143)
우리는 '확실한 직업'과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이 우선
그런 행복을 갖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드폰, 컴퓨터, iPOD와 내비게이션이 그랬듯이, 사람들은 사는 동안 아주 짧은 시간에 익숙해지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감했다. 혼란스러웠던 것은 10년 후의 삶의 방식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보다도 더 그리기 어려웠던 것은 더욱더 낯선 기술에 적응해 나갈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p.295)
『세월』을 덮으며, 아니 에르노의 글이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시대와 세대,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다는게 재밌었다. 책 속에서 작가는 프랑스에서의 자신의 삶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가 속한 모든 인간의 삶을 비추고 있었다.
읽는 내내 무겁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는 프랑스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고, 개인적인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과 맞물리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세월』은 단순히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읽은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삶과 시간, 그리고 기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