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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노는 법, 나만의 오솔길

슬기로운 은퇴생활 _ 사색을 등에지고

by Erica

등산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빨강, 노랑 재킷에 얼룩덜룩한 바지를 입은 아저씨, 아줌마들. 시끌벅적한 목소리, 산 입구에서 벌써 막걸리 한 사발을 기울이며 흥이 오른 사람들.

한때 나는 ‘산’ 하면 이런 풍경부터 떠올라 아예 근처에 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산에 가고 싶어졌다.

숲 속을 걷고 싶었다.

신축해 이사한 신사옥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나의 폐 속에 환경 호르몬이 쌓이는 것 같았고, 꽉 막힌 도로 출퇴근 길에 갇혀있다보면, 이 매연에 덮여 오염된 바다에서 떠내려오는 죽은 물고기 떼들처럼 인간들도 언젠가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 때였다. 그래서 도시 안에서 피톤치드가 가득한 산소방을 찾고 있었다.


체력이 좋지 않았으니, 회사 앞 여의도 공원을 점심시간마다 걸었다.

그러다 퇴사한 후로는 집 근처 둘레길,

같은 길을 매일 걸었다.

어떻게든 하루에 한 번은 나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풍경이 매일 바뀌는 탓인지 지루하지 않았다.


걷다 보니 많이 걷게 되었고,

많이 걷다 보니 높이 갈 체력이 쌓아졌고,

높이 가다 보니 정상에서의 바람이 마음의 근심을 모두 가져가 버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등산이란,

단순히 정상 정복이 아니다.

천천히 걸으며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고,

숨이 차오를 때면 힘듦이 근심을 지우는 시간이 되며,

정상에서의 시원한 바람이 미래의 희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심심할 땐 같이 걸어주는 친구가 되고,

체력이 좋아지면서 건강을 되찾는 재활병원이 되기도 한다.


혼자 산에 가는 매력

등산의 가장 큰 매력은 ‘혼자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한 시간, 두 시간, 다섯 시간이고 간에, 원하는 만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친구와 함께하는 등산도 즐겁지만, 혼자 가면 내 페이스대로 걸을 수 있다는 특별한 자유가 있다. 숲 속의 향기를 충분히 음미하며 천천히 걸을 수도 있고, 가끔은 길가에 앉아 한참을 쉬어 갈 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100대 산 정복’ 같은 경쟁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만의 방식으로 자연을 누릴 수 있다.


어딘가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그냥 멈춰 서서 바람을 맞아도 되고, 어딘가 벌러덩 누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쉴 수도 있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해 질 녘이다.

산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누구의 눈치 볼 것 없이 원하는 만큼 앉아 온전히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등산하면 대화에 집중하지만, 혼자 걸으면 내 머릿속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숲 속에서 내 호흡 소리만 들으며 걷다 보면 고민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로 돌아간다.


신기하게도 같은 길을 걸어도 매번 새로운 풍경을 만나게 되고, 혼자라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처음에는 혼자 걷는 게 어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매번 같은 길도 계절에 따라 색이 바뀌고, 나뭇잎 하나하나가 다르게 흔들린다는 걸.

정상에 앉아 바람을 맞으면, 또 왔네.. 하고 산이 인사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혼자만의 카페도 항상 나를 기다린다.


혼자 산에 오르는 것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풍경을 보며 또 한번 느낀다. "그래, 오늘도 잘 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내려온다.

삶도 등산도, 결국은 내려오는 길까지가 온전한 여정이니까.




"자연에 대한 경이의 감정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것, 인간 삶의 경계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그 무엇을 새롭게 깨닫는 것, 이런 것들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을 즐겁고 기쁘게 보내기 위한 방법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확신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매우 깊은 그 무엇, 언제까지나 이어질 의미심장한 그 무엇이 있다고. 과학자든 일반인이든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삶의 고단함에 쉽게 지치지도 사무치는 외로움에 쉽게 빠지지도 않는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일상에서 분노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오솔길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그 길을 걷다 보면, 분노와 걱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활력과 흥분을 되찾을 수 있다."『센스 오브 원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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