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달은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자극하고, 그 반대로 예술가의 창의력에 대한 욕망은 새로운 기술개발의 촉매가 된다. 현대예술은 인공지능 아트, 인터랙티브 아트, 키네틱 아트, 알고리드믹 아트, 프로젝션 매핑, 로봇 아트 같은 미디어 기술과 활발하게 결합하면서, 실험도 다양해 졌다.
최근 이 분야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기술이 로봇 예술이다. 1954년에 발명된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한 디지털 로봇, “Unimate”는 1961년에 미국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에 팔렸다. 체코 말로 “일”을 의미하는 “robota”라는 말에서 나온 “로봇”은 그 시작부터 생산 공장에서의 사용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그래서 “일”이 아닌 다른 목적의 로봇 활용은 주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선도적인 연구자들과 예술가들이 로봇과 예술을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로봇을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인 센서, 판단장치, 실행기관은 이미 문화·예술계에 적잖이 도입되어 있다. 로봇 하면 실제로 움직이는 장치가 달린 기계가 연상되기 때문에 예술계 초기 로봇은 추상회화를 그리거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가상현실, 인공지능 등의 새로운 기술과 결합하면서 예술의 주제와 표현이 다채로워졌다. 과거의 데이터를 축적·학습시키는 인공지능의 발달은 로봇과 융합을 활발하게 촉진하며 음악, 연극, 무용, 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예술작품을 경계를 넓히고 있다.
산업용 로봇을 이용한 예술
산업용 로봇이라고 하면 팔의 형태를 지니는 로봇팔(Robot Arm)을 이용해서 다양한 설치 작업을 하거나, 퍼포먼스 등을 행하는 예술을 말한다. 2008년에 제작된 골란 레빈(Golan Levin)의 <Double Taker(Snout)>가 유명하다. 돼지코, 주둥이라는 뜻을 가진 Snout 작품은 겉보기에는 원통형의 외눈박이 괴물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ABB사의 산업용 로봇이 들어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과 인터렉션하면서 강렬한 느낌을 전달한다. 또한 로봇 퍼포먼스 작품으로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의 <Black Flags>가 있다. 축구 경기장에서 커다란 깃발을 흔들며 응원하는 모습을 인상깊게 보고, 그 모습을 조각처럼 작업하여 표현한 이 작품은 감상자에게 지치지 않는 웅장한 힘을 느낌을 전달한다.
골란 레빈의 Double Taker(Snout)와 윌리엄 포사이스의 <Black Flag>윌리엄 포사이스의
지휘하는 로봇
2022년 7월 국립극장의 새 시즌 연주 레퍼토리로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2023년 6월 30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4-부재(不在)>의 지휘자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협업해 개발 중인 로봇이 관현악을 지휘할 예정이다. 서양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서 로봇 지휘자가 포디엄에 오른 적은 있지만, 국악관현악을 지휘한 적은 없었다. 공연 제목 ‘부재’는 인간 지휘자의 부재를 뜻한다.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로봇이 악보를 학습하고 연주자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살피면서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휘한다.
2023년 6월 30일 해오름극장에서 공연 준비중인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4-부재(不在)>의 로봇지휘자
연극하는 로봇
일본의 연출가 히라타는 로봇 연극 프로젝트를 인공지능 로봇 권위자인 이시구로 히로시와 함께 2008년에 시작하여, 2010~2012년에 작품을 완성해 세계 최초로 안드로이드 로봇을 연극에 출연시켰다. 2013년에는 국내에서도 공연돼 화제를 모았다. <사요나라>라는 이 작품에는 인조인간 '제미노이드F'가 로봇으로 등장해, 불치병에 걸린 여자를 위해 그를 위로하는 시를 읽어준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제미노이드F가 한 남자로부터 대지진과 원전 사고가 난 후쿠시마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실을 전해 듣는 과정의 대화를 담고 있다. 제미노이드F는 인간의 모습을 닮은 안드로이드 로봇으로, 실제 20대 여성의 생김새를 모델로 제작됐으며 65가지의 표정 연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고, 말할 때 입을 움직이고 표정 짓는 모습은 여전히 어색하다. 직접 움직일 수는 없으며, 컴퓨터를 이용한 원격조종으로 작동한다.
연극 <사요나라> 작품에 등장하는 휴머노이트 로봇 '제미노이드F'
한국에서는 서울대 공대출신 3인으로 구성된 아티스트그룹 팀보이드가 2015년 선보인 <Malfunction(오작동)>이란 작품이 있다. 3D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는 비현실적인 로봇의 움직임을 현실 공간에서, 항상 동일한 움직임으로 끝없이 반복하여 상영(공연)하는 약 3분 정도의 단편 로봇극이다. 자아 인식을 하게 된 로봇과 이를 막으려는 로봇간의 갈등과 화합을 다룬 로봇 공연으로 의의가 있다.
로봇연극의 향후 도전영역은 즉흥공연이다. 즉흥공연은 연출가가 캐릭터, 목표 상태, 방해물, 주어진 상황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여 시나리오를 형식화한 후에 이러한 변수에 따라 로봇 캐릭터가 즉흥적으로 새로운 공연을 하는 것이다. 2000년에 카네기 멜론대학에서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즉흥공연을 시도한 바는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진화는 없다.
무용하는 로봇
저명한 스웨덴 안무가 프레드릭 벤키 리드만(Fredrik 'Benke' Rydman)은 2018년 스톡홀름에서 900kg ABB 산업용 로봇 IRB 6620과 섬세한 듀엣을 공연했다. 공연은 기술, 자동화 및 인공지능(AI)에 따른 역할 변화와 인간과 로봇 사이에 가능한 협업과 진보된 상호작용을 묘사하고 있다. 이날 진행된 시사회에서는 기립 박수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가 이어졌다. 벤키 안무가와 함께 공연한 ABB 로봇 IRB 6620은 자동차 생산공장과 같은 중공업 분야에서 사용되는 모델로, 공장 작업자와 함께 긴밀하게 작업이 필요한 용접 및 복잡한 조립공정에 적용되는 것으로, ABB 산업용 로봇 중 가장 크고 무거운 대형 로봇이다.
2019년 영국 로봇기업 엔지니어드아츠(Engineered Arts)와 옥스포드대 알고리즘개발자, 그리고 리즈대 인공지능 엔지니어가 함께 개발한 아이다(Aida)를 세계 최초의 로봇화가로 부르지만 실제 세계 최초 로봇화가는 따로 있다. 바로 ‘아론(Aaron)’이라는 로봇이다. 헤럴드 코헨(Harold Cohen) 예일대 교수가 1974년 처음 선보인 아론은 코헨교수가 사망하기까지 40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였다. 초기에는 추상적인 형태가 어우러진 그림을 그리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드로잉이 가능한 전문가 수준의 로봇화가가 되었으며, 마침내 1995년에 채색까지 할 수 있는 단계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아론은 2007년 샌디에고에 영구 전시되었다. 아론은 그림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 아론은 이미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색과 모양을 판단하여 그림을 그린다. 실제로 아론이 그린 그림을 보면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헤럴드 코헨(Harold Cohen)과 채색중인 로봇화가 아론
로봇, 예술의 동반자인가, 조력자인가
현재 로봇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 접목되면서 폭발적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술과 기교의 경계에 있다. 로봇예술이 일부 자율성을 가진 즉흥적인 퍼포먼스의 가능성도 선보이지만, 여전히 미리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스스로 “의도성”을 가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 기술이 등장하여 로봇과 결합한다면 완전한 자율성과 의도성을 지닌 로봇 아티스트가 나오겠지만, 그런 특이점(singularity)의 등장 시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에 있다.
현단계에서 로봇은 인간 예술가와 협업을 통해 완성도 있는 작품을 구현하는 정도다. 여전히 기계라는 선입견이 예술 감상자에게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표현의 한계도 뚜렷하다. 하지만, 로봇은 인간의 훌륭한 파트너로 인간 예술가의 창의적인 다양한 시도를 구현하도록 도움을 준다. 예술가가 얻은 영감을 표현해주는 로봇예술가의 시도는 계속될 것이고 협업의 방식도 크게 진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