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할 수 있는 나에게 남은 마지막 난자였다

by 오서리

“나 신게 먹고 싶어!”


“그래? 뭐 해줄까? 말만 해.”


“김치전! 김치전 해줘.”


라면 물도 맞추지 못할 만큼 음식이라면 젬병인 신랑이 웬일인지 선뜻 일어나서는, 그 쉬운 김치전을 2시간 만에 내 앞에 가져왔다. ‘김치전을 이렇게 맛없게도 만들 수 있구나!’라고 감탄하며 먹고 있는 내 옆에서 신랑은 턱을 받쳐 들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드라마에서 임산부들이 하는 ‘신게 먹고 싶다.’라는 말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검사 결과에서 ‘임신’이라는 통보를 받으면 신랑한테 그 말을 처음으로 하고 싶었다.


결국, 우리 둘은 김치전을 앞에 두고 울었다.

오늘까지만 울고 이젠 그만 울자는 무언의 약속이나 한 듯 원 없이 울어버렸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아니, 실패가 아니라,

이식할 수 있는 나에게 남은 마지막 난자였다.




결혼하자마자 바로 시험관 아기를 시작했다. 내 나이 45, 신랑 나이 50에 둘 다 너무 늦은 결혼이었고, 둘 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 처음부터 자연 임신은 배제한 채 의학의 힘을 믿기로 했고, 시험관 아기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우리는 마지막을 경험했다.


대기업 디자인그룹에서 일하고 있던 나, 경북 구미에 있는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신랑은 매달 시험관 아기의 난자와 정자 채취를 위해 시간을 맞춰야 했다. 시험관 아기를 위한 난자 채취는 나와 의사의 스케줄에 의해 예약되는 게 아니었다. 생리 시작 이틀 후부터 3주일 동안 나의 몸 상태를 매번 초음파로 내진을 하고, 난자의 크기에 따라 더 자라게 하는 주사를 맞던가, 그만 자라게 하는 주사를 맞고, 정확한 크기가 될 때까지 난포에 있는 난자들을 키워서 정확한 시간에 채취를 해야 하는

‘정교한 미세 세포 키우기 타이밍 싸움’이었다.


어느 날은 회의하다가 병원으로 뛰어갔고, 어느 날은 대표이사 보고를 하다가도 화장실 가서 혼자 배 주사를 놓았다. 초반엔 “그래, 가야지. 가봐야지.”라고 파이팅을 외치던 팀장님도 시간이 흘러 매번, 매달, 몇 년을 같은 일들이 반복되니, “그래? 지금 가야 하나? 오늘 들어올 수는 있나?” 로 바뀌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속담은, ‘긴 난임에 회사의 자비란 없다’라는 패러디로,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동료들 사이에서 퍼져갔다. 그렇게 나는 빈자리가 티 나지 않게 일에는 더욱 매진했고, 실패를 거듭하는 임신일수록 더욱 집중을 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많이 아팠고, 결혼한 지 3년 만에 난임 휴직을, 그 후 6개월 후엔 결국 퇴직을 했다.


24살부터 20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디자이너로서 일하고, 공부하고, 또 일하기를 반복했다. 퇴직이란 나에겐 또 다른 실패의 시작이었다. 나는 일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좋아하던 술을 몇 년 동안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염색하면 머리 모공 속으로 화학약품이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백발 마녀인 나는 염색을 끊었다. 그 좋아하던 국수, 빵, 과자도 끊었다. 유전자 변형으로 이루어진 GMO 농산물도 끊었다. 채소를 먹어야 임신에 좋은 알칼리 몸으로 변한다고 해서 육식 파인 내가 야채를 입에 달고 살았다. 마음이 슬프면 몸이 산성으로 변한다는 말에 거듭되는 실패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유명 여자 연예인이 성공했다는 서울 유명 산부인과, 난임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병원도 강남점/서울역점, 전국에 체인점이 있는 가장 대중적인 난임 병원, 분당에서 제일 유명한 여성 전문 병원, 종로의 난임 전문 한의원, 새벽 5시에 번호표까지 끊는다는 양평 한의원, 보약 딱 한 첩에 봉침 맞고 임신에 성공했다는 대구 유명하다는 한의원, 전국에서 몰려온다는 증평의 한약방까지

양의, 한방 전국에 안 가본 병원이 없었고, 안 해본 짓이 없었다.

사실은 전국에 안 가본 점집마저 없었다.


난임 초기에는 “희망이 크진 않지만 그래도 노력해봅시다.”라고 했던 의사 선생님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망성이 거의 제로예요. 몸이 많이 힘들 텐데, 이젠 그만 하시죠.”라는 멘트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퇴직 후 2년을 더, 어렵게 단 2개의 난자 만을 채취해서 냉동시켰고, 이젠 더 이상 내 몸에선 정상의 난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마지막 2개의 난자를 이식시키고, 2주일 후에 임신 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하도 오래 다녀서 단골 환자가 되어서 이젠 친구처럼 되어버린 담당 간호사는 “임신이 안되었어요.”라는 말을 남기곤 자기도 마음이 안 좋은지 바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김치전 앞에서 몽땅 울어버리곤, 난 또 눈물을 닦고 신랑한테 말했다.


“이젠 술 실컷 마실래!”


“그래, 우리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쏘맥 하자!”


임신을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해왔던 일도 포기하고, 회사도 퇴직하고, 결국은 임신도 실패하고는 그 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깊은 수렁에 빠진 다람쥐처럼 아무리 발돋움을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대체 이 끝없이 긴 터널을 빠져나갈 수는 있는 걸까? 아니, 터널의 끝은 원하지도 않으니,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만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국내 최장 터널인, 거리가 10km가 넘는 ‘인제 양양 터널’을 지나야 비로소 양양까지 갈 수 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터널의 중간쯤 가면 숨이 턱턱 막히고, 빨리 터널을 빠져나가고 싶고, 약간의 공포감도 밀려온다. 그때쯤 되면 터널 안에서 형광색 표지판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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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통과 중


이상하게도 이 표지판을 보면 갑갑했던 마음은 약간의 위로가 되는 듯, 내가 지금 대한민국 등줄기를 뚫고 가고 있으니, 조금 더 참아낼 수 있는 힘을 내게 준다.

그렇게 나는 그 숭고한 백두대간을 통과 중인 것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중간 어딘가 쯤이라고 생각하고, 남은 터널 끝이 나올 때까지 열심히 달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시고 싶었던 쏘맥이나 실컷 마시면서.


그러면 언젠가는 양양에 도착해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