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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Aug 28. 2020

100년 가업

저녁 8:50이면 시작하는 'EBS 세계 테마 기행'은 나에겐 하루의 마지막 여정이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와 직접 겪어보는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다. 근래에는 여행을 갈 수 없는 여건 때문에 예전에 했던 여행 방송을 보여주고 있다. 안 본 에피소드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은 스페셜 편으로 ‘구석구석 알프스’라는 주제로 몇 개의 에피소드를 편집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여행가는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한 여성이 가정집 지붕 위에서 뭔가 하는 것을 발견했다. 여행가도 지붕 위에 올라가서 보니, 굴뚝 청소부였다. 검정 옷을 위아래 갖추어 입고, 손에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무거운 추가 달린 와이어 청소 쇠 솔을 굴뚝 안으로 집어넣으니 시꺼먼 연기와 먼지가 함께 피어오른다. 여행가가 따라 해 보니 그의 옷과 손이 이내 시커메졌다. 여행가와 굴뚝 청소부 아가씨가 지붕에서 내려와 다른 집을 올려다보니 그녀의 아버지 역시 굴뚝 청소를 하고 있었다.


100년 가업을 잇는 굴뚝 마스터

 


그녀의 아버지가 설명하기를, 자신은 25년째, 딸은 5년째 굴뚝 청소를 하고 있고,

현재 5대째 이어지고 있는 100년 가업이라고 했다.

현재는 자신과 딸 이렇게 두 명을 스스로 ‘굴뚝 마스터’라고 칭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물론 일을 하면 더러워지고 힘들지만, 자랑스럽고, 일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했다. 일을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라고 했다. 그것이 전통이 되고, 가족 내에서 물려주는 것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울 거라고 그의 직업관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5대를 이어오는 100년 가업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했던 일들은 미천하고 못 배워서 했던 일이라 자신을 치부해버렸었다. 그래서 내 아이는 반드시 서울로 보내서, 공부시키고, 대학 보내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자신보다 더 좋은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사는 인생을 원했었다. 선생님, 공무원, 대기업! 이렇게 3가지가 우리네 부모님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직업군이었을까? 아버지가 하시던 뻥튀기 장사를 아들이 물려받으면 훌륭하지 않은 것일까?


1940년 종로 1가에서 외할머니는 처음으로 ‘송옥 양장점’이라는 작은 브랜드를 만드셨다. 손재주가 좋았던 할머니께서는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아가씨들의 원피스와 투피스, 겨울 코트 등을 직접 만드셨다. 지금은 양장점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어지고 옷은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사 입는 것이지만, 1910년 대한 독립 이후 한국 양장의 역사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송옥 양장점


안타깝게도 1979년, ‘송옥 양장점’을 만들고 39년 만에 금융사고로 파산하게 되었다. 엄마를 포함한 외갓집 이모 삼촌들 11남매 중 그 누구라도 외할머니의 양장 기술을 물려받았다면 과연 할머니의 양장점은 파산했었을까? 왜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 11남매나 되는 자식을 낳아 그 자식들이 자식들을 낳을 때까지 그 누구도 양장 기술을 배워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치수를 재고, 옷감을 자르고, 단추와 지퍼를 고르고,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만들어가는 옷 짓는 일이 어쩌면 외할머니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고난과 일말의 돈벌이였을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가 아닌, 과정은 영원하리라’는 생각으로 Old vs. New 사이에서 늘 번뇌에 휩싸여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한다. 반드시 가족에게만 물리는 것이 가업은 아닐 것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시작이지만, 가치와 철학이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없어지더라도 후배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남기게 한다면 '100년의 작은 가게'는 의미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매일 흥하고 망하는 동네 가게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100년 가업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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