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을 하네

by 오서리

학교 다닐 때, 내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10월 중순에 있는 생일은 항상 중간고사 기간에 끼어있는 탓에 생일 전에 하든가, 아니면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겸사겸사 생일이라고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그때는 왜 가을날 내 생일이 싫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이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말이지.


계절에 맞춰 살라.
공기를 들이쉬고,
물을 마시고,
과일을 맛보라.
계절의 영향을 따르라.
계절이 주는 것만
매일 마실 음료와 약초로 삼으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프랑스 스타일, 미레유 길리아노 저, 마음산책>


계절에 맞추어 사는 것을 좋아한다. 계절에 따라 공기가 숨 쉬어지고, 먹고 싶은 게 달라지며, 옷차림이 변화되는 것을 즐긴다.


1년을 4계절로 나누기만 했다면 얼마나 심심했을까? 옛 조상부터 쓰던 계절 방식인 24절기는, 각 계절마다 여섯 개의 절기로 쪼개어 태양을 황도상 위치에 따라 계절적 구분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가을의 여섯 개 절기 중 10월 8일은 찬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한로(寒露)이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10월 23일은 상강(霜降)이라 부른다. 11월 7일부터는 겨울의 시작인 입동(立冬)이니, 이젠 가을을 즐길만한 기간은 채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여지까지 애매하게 여름 반팔도, 겨울 긴 팔도 아닌 채였다면 지금부터는 낯설거나 무안해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긴팔과 카디건을 걸칠 수 있다. 가을날 길거리의 가장 괴로운 냄새의 진원지인 가로수 은행들이 떨어지는 시기가 시작되어, 버스라도 탈라치면 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정류장을 뛰어다녀야 한다. 싱싱하던 포도와 복숭아가 물컹해지며 시들해지면 빛깔 고운 감과 배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가을이라면 우리 집에서의 변화가 눈에 띈다. 여름 내내 냉면과 메밀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가스 불 켜는 것도 싫더니만, 이젠 드디어 미역국과 뭇국이 먹고 싶어 진다. 참기름에 달달 볶은 미역에 국 간장을 살짝 넣고 푹 우려내면 그 어떤 사골국물보다 뽀얀 뜨끈한 미역국 한 그릇이 된다. 여름 동안 맛대가리 없었던 무는 이젠 이빨이 안 들어가도록 단단하고 달착지근한 무맛을 자랑한다. 소고기를 착착 썰어, 참기름에 볶다가 무를 넣고 한소끔 끓여내면, 뭇국에 밥 말아서 김치 올려 먹는 그 맛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한로(寒露)가 지나면서 맨발에 맨바닥은 이미 찬 기운이 느껴진다. 옷장 속 깊숙이 있던 두꺼운 수면 양말을 꺼내어 벗었다 신었다를 반복하다 보면 금세 상강(霜降)으로 흘러가 더 이상 양말을 벗지 않게 된다.


나는 옷차림에 있어서는 수줍음이 많은 편이다. 옷장 문을 열면 검정, 감색, 회색, 베이지, 흰색 옷뿐이다. 원색이나 꽃무늬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왜 옷에서는 그리 용기를 내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을날의 필수품인 스카프에게 있어서는 마음껏 모험을 하는 편이다. 원색이나 화려한 무늬를 허락하는 스카프 한 장을 걸쳐야 하는 가을이 그래서 좋다.


찬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전기 티포트를 드디어 꺼낼 때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생강, 대추, 감초를 넣고 1시간을 우려내어 하루 종일 마신다. 오장육부까지 뜨끈해지며 왠지 건강해지면서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기분이 든다.



이렇듯 봄에서 여름은 얼토당토 하게 은근슬쩍 넘어가지만, 여름에서 가을은 드라마틱한 변화가 눈에 띈다.



한로(寒露)와 상강(霜降) 사이에 있는 내 생일날,
가을 가을한 미역국 한 그릇과
쌉쌀한 생강차를 달여 먹으며
40대의 마지막 가을을
숨 쉬듯 가볍게 맞이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