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499,000원짜리 다이슨 헤어드라이어를 사기 위해 단추를 누를 뻔했다.
(일시불은 3만 원 할인해준단다. 그러나 나는 그 많은 돈을 일시불로 낼 수는 없다.)
한 달에 20,792원만 내면 된단다. 비록 24개월이 멀고도 험한 길이지만, 나도 다이슨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려보고 싶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반드시 나오는 미국 히어로가 007 가방에 있는 미사일 단추를 누를까 말까를 무지하게 고민하다가 누르지 않고 세계평화가 찾아오듯, 우리 집 경제 평화는 누르지 않은 나의 단추 하나로 희망을 되찾았다.
결혼 전부터 10년 정도 쓰던 헤어드라이어가 드디어 며칠 전에 망가졌다. 약 한 달 전 이미 망가졌었다. 갑자기 먹통이 된 헤어드라이어를 보며 난 씩~ 웃었다.
‘드디어 이 녀석이 나에게 다이슨을 맛 보라군!’
신의 계시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쑤시개로 망 사이에 있는 먼지를 걷어내니 다시 윙~소리를 내면 잘 돌아갔다.
젠장! 앞으로 10년은 더 쓸 거 같았다. 그런 그 녀석이 며칠 전에는 정말 망가졌다.
오서리 : 오빠! 내 헤어드라이어 망가졌어. 나 다이슨 살래.
신랑 : 다이슨이 뭔데?
오서리 : 연예인들이 다 쓰는 건데, 청소기로 유명한 영국 다이슨 브랜드인데, 그걸로 머리를 말리면 머리 결이 겁나 좋아지고, 머리숱이 많아지고, 풍성해지고, 10초 만에 머리가 다 마르고 마치 구루뿌 만 것처럼 예뻐진대. 나 그거 살래.
신랑 : 얼만데?
오서리 : 499,000원.
신랑 : 뭐? 얼마? (얼굴이 창백해지며) 당근 마켓에 나오면 사줄게.
(혼잣말로, ‘걔들은 청소기나 만들지, 왜 드라이어를 만들어서..’)
오서리 : 그런 건 당근에 안 나와!
신랑은 물건이 잔뜩 쌓아놓은 박스들 사이를 한참 뒤지더니, 손바닥만 한 장난감 같은 헤어드라이어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신랑 : 이거 내가 총각 때 쓰던 건데 아직 되네. 이걸로 머리 말려. 잘 마르더라. 이래 봬도 이거 필립스 거야. 수입 명품!
마침 어제 신랑과 TV를 보고 있는데, 그 예쁘고 마르고 인형같이 생긴 최은경이 쇼 호스트로 나오는 프로에서 다이슨 헤어드라이어를 팔고 있었다. 신랑은 내가 보기 전에 채널을 돌리기 위해 잽싸게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고, 나는 그 손은 낚아챘다.
리모컨은 내 손에 있었고, 난 침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날 한참을 쳐다보던 신랑은,
신랑 : 하나 사. 이거 사면 10년 동안 니 생일, 내 생일, 결혼기념일 기타 등등 모든 기념일에 줄 선물 포함되는 거다!
앗싸! 두근두근두근!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드디어 나도 윤아처럼, 효리처럼, 아이유처럼 저런 북실북실하고 탐스럽고 멋쟁이 언니들처럼 이뻐지는구나.’
결국 난 마지막 단추를 누르지 못했다.
세계 평화를 지키기로 했다.
신랑 : 왜 안 샀어? 홈 쇼핑에 나올 때마다 닦달하느니 그냥 하나 사. 너한테 그거 하나 사줄 수 있어. 대신 난 3년 동안 라면만 먹을게.
오서리 : 다음에 저런 거 일시불로 살 정도 되면 사자! 그냥 필립스 쓸게. 명품이잖아.
가난이 별거냐? 부자가 대단한가?
돈의 유무와 상관없이 내 마음의 풍요로움이 좌우하건만..
오늘도 난 100W짜리 힘 없이 돌아가는 필립스 헤어드라이어로 20분 동안 머리를 말린다.
나의 작은 취미 중 하나는, 1900년도 사실주의를 표현한 한국 단편소설을 읽는 것이다. 아주 소소한 주제와 이야기이지만, 간혹 나에게 지혜와 풍요로움을 안겨주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며칠 전, 현진건의 ‘빈처’를 다시 읽으며, 지금의 나의 일상을 겹친 이야기를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