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헤니 Heny Kim Mar 27. 2021

18화, 그림 뒤의 그린 스무디

이리저리 헤맨 사람의 레시피




코로나가 끝나서 앙굴렘 만화 축제에 다시 가게 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달려갈 곳은 그 해 새롭게 완성된 책들이 사고 팔리는 광장이 아닌 작은 앙굴렘 박물관이다. 그곳에 설치되는 전시장에서는 매년 선정된 작가 한 사람이 다양한 시기에 걸쳐 그린 원화를 만나볼 수 있는데, 2017년 앙굴렘 만화 축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발견한 카미무라 카즈오(1940-1987)의 원화를 처음 마주하고 섰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난 어떤 작용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때까지 방문했던 다른 어떤 미술관에서도 느낀 적 없었던 해일같이 큰 파도가 일었다. 그림뒤로 그가 그려넣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펼쳐졌다.


그는 주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배경으로 유혹하거나 복수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여성의 삶을 만화로 그렸다. 강남역 살인 사건과 미투 이후 한동안 만화나 거리에 그려진 남성의 시선으로 성적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느꼈던 나였기에, 그가 그린 나체의 여성들은 왜, 어떻게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는지 궁금했다. 우선 그가 그린 여성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어려움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진실되게 느껴졌다. 남성인 작가가 만화라는 틀을 가지고 드랙을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그의 작품 <수라설희>는 시간이 흘러 타란티노의 영화 킬빌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그 다음 해에 깨달은 사실은 모든 작가의 원화에서 그런 힘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림을 마주한 순간 나에게 문제되어 온 일과 작품과의 화학작용도 중요하겠지만 인쇄된 종이 위가 아닌 원화에서만 보이는 그 역동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종이라는 평면 위에 누군가의 생생한 에너지가 몇십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고스란히 담긴채 보관되어 있었고, 그걸 완전히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아온 사람인 내가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흥미진진 했다.


도시의 반대편에 위치한 만화 박물관에서는 종이 위에 처음으로 글과 그림을 함께 놓았던 최초의 만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부터 오늘날의 만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원화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한 전시에서 칼보 Calvo(1892-1957)의 그림을 본 순간에는 그에 관해서 알고 있는 바가 하나도 없었는데도 그 에너지에 우와, 하는 탄성을 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그린 검은 고양이 캐릭터는 마치 종이를 찢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했다. 작가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쏟아부은 만큼의 에너지가 작품의 생명력으로 전환된 것 같았다. 그가 동물과 기계를 의인화하여 전쟁과 설화를 그린 방식은 시간이 지나 아트슈피겔만의 그래픽노블 <쥐, Maus>에서도, 애니메이션 <카, Cars>에서도 적용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늘 두려웠다. 다른 일들은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별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는데 생각만큼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거나 주변에서 선을 똑바로 못 긋는다거나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숨길 수 없었고, 그게 다른 사람들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사실이 불편했었다. 흰 종이 위에 그려지는 글자의 크기와 흐름, 사물들의 거리가 내가 주변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 자신의 경험으로 글과 그림으로 전달되는 힘과 깊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데도 주변 사람들의 만화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 별 가치가 없다는 인식에 쉽게 흔들렸고, 그 때문에 만화를 배우고 그리는 내내 소용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낼 힘은 이미 내 안에 충분히 존재하고 있었는데도 스스로 가치있다고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계속해서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바뀌어야 했다. “너 그런 걸 좋아해?” 라는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런 질문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좋은 취향의 추구가 자유에 대한 두려움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아챌 수 있었다면. 그 질문 속에 어리고 약한 존재를 향한 혐오가 들어있다는 걸 똑바로 볼 수 있었다면. 진심을 이야기해도 아무도 비웃지 않는 곳에서 나의 진심을 이야기할 기회가 단 한 번이라도 더 있었다면 뭐가 달랐을까?


헤맨 사람에게는 헤맸다는 정체성이 있다. 같은 장면을 다른 방향에서 보면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되는데, 원래 가던 길에서 벗어나 헤맸다는 건 이제부터는 가고 싶은 길에 대해서 스스로 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반복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는 구성에 조금 더 신경을 쓰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리는 그림에서 나타나는 단점이 어쩌면 나의 인생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 내가 가장 먼저 배워야하는 부분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구성이라는 게 정말로 무엇인지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사전에서 그 뜻을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구성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내게 익숙한 방법으로 그린 스무디를 만들어보았다.



구성 composition :


여러 요소 또는 부품의

조립 또는 조합으로

전체를 형성하는 동작; 그 결과



단맛을 내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과일인 대추야자와

고소한 맛을 내는 녹색채소를 넣은 그린 스무디를 만든다.


내가 가진 재료들을 비율대로 믹서에 넣고 간다.

맛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지점을 발견한다.

스무디의 입자가 일정해지고, 윤기가 나는 순간을 찾는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고운 녹색의 그린 스무디를 마신다.



뭐든 넣는 만큼 맛을 낸다.












작가의 이전글 17화, 친절한 팬케이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