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헤니 Heny Kim May 24. 2020

2화. 섞지 않은 과일 접시

이리저리 헤맨 사람의 레시피



처음 요리를 직업으로 삼기로 했을 때를 기억한다. ‘엄마도 요리로 생계를 꾸려왔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요리로 돈을 벌어 먹고살겠다는 결심 했던 기억이 난다. 한참 후, 요리사로서 3년, 요리 학교에서 비싼 값을 치루고 낮은 임금을 받으며 팔라스 호텔 레스토랑의 인턴으로 주50 시간씩 달리며 일을 한 지 4개월이 지났을 즈음, ‘그렇다면 이건 누구의 삶이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20대에서 4년이란 긴 시간을 요리사로서 보낸 뒤였다.

가족들이 사는 부산에서 9,285km. 친구들이 사는 익숙한 도시 서울에서 떨어져서 외국인,
아시안, 여성, 유학생으로서 맞는 두 번째 해 생일. 서른이라는 나이로 들어서면서 마침내 살아오면서 내가 주변과 맺은 관계에서 주고받은 영향을 하나하나 뜯어 볼 수 있는 시공간이  생겨났다.

내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나. 나의 선택, 나의 취향이라 여겨왔던 수많은 것들이 대부분 주변에 보이기 위한, 어딘가에 속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 누군가에 의해서 말해진, 나 자신에 의해서 말해진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고 인정하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분갈이 때가 된 식물처럼 성장을 멈추고 한 동안 시름시름 시들다가 뿌리가 뽑혔는지 사정없이 흔들렸고, 엄마가, 가족이, 주변과 친구들이 나에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해온 것들을 흙처럼 털어내고 난 자리엔 별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프랑스 요리 학교에선 한 접시에 담기는 채소들을 각기 다른 팬에서 조리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면 한 번에 여러 가지 채소를 먹어도 각자의 고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주변과 나를 한 데 섞어 요리했었다. 처음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을 땐 내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먼저 지워야 했다. 나는 섞지 않은 맛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침 식사를 위한 과일 한 접시

향기가 있는 과일을 마음껏 산다.
각각의 특징에 맞게 잘 깎는다.
섞지 않고 한 그릇에 담는다.
각자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채며 맛있게 먹는다.



작가의 이전글 1화. 찹쌀 고추장과 조청, 쌀 떡볶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